22일 새벽, 세상을 떠난 소설가 박완서(朴婉緖)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바로 ‘나목(裸木)’이다. 1970년, 그러니까 우리 나이로 마흔 살에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된 ‘나목’은 고인의 등단작이자 출세작으로 6.25전쟁 중 노모와 어린 조카들의 생계를 위해 미군부대에서 근무할 때 만난 화가 박수근을 모델로 하고 있다. 주인공은 PX에서 미군 병사들을 대상으로 손수건에 초상화를 그려준다. 그가 그린 소설 속 앙상하게 시들어가는 나무는 죽어가는 고목이 아니라, 모진 추위를 견디며 새봄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생명력이자, 희망의 뿌리를 품고 있는 겨울나무다. 후일 고인은 박수근의 국보급 작품인 ‘나무와 여인’에서 소설 ‘나목’의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예술가는 아름다운 것들을 창조하는 자다. 예술을 나타내고, 예술가를 감추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서문에 나오는 글이다.
1958년에 번역돼 나온 이 책을 박완서는 유난히 아꼈던듯하다. “어머니가 좋아했던 책인데 내가 조금 성장했을 때 이 책을 뽑아주시며 눈을 빛내셨다.
어머니의 작품에서 어떤 구절들, 탐미적이고, 어떤 묘사에 도취된 듯한 표현을 접할 때마다 오스카 와일드가 생각난다.” 맏딸인 호원숙의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다.
불혹의 나이에 등단한 이 후 부드러운 필력으로 ‘너무나 인간적인’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으며 이 땅의 수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았던 대표적인 작가가 박완서다. 작가의 저력은 자전적 소설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유년의 기억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성년의 자화상이기도 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와 같은 작품에서 빛을 발한다. 이들 작품은 들은 이야기나 상상으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정확하고 세세한 기록들로, 그 자체만으로 마치 기록영화를 보는 듯 진실의 힘을 갖는다.
고인은 1993년 소말리아 내전이 극심했던 당시 난민촌에서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직접 본 후 참담한 심정으로 “내 눈으로 봤다는 것이 죄다.
내 눈으로 보았는데 어찌 가만있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지극한 마음으로 살다가 홀연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마지막 산문집 제목처럼 아름다운 길을 찾아 떠난 고인의 삶이야말로 아낌없이 벗어주고 봄을 기다리는 정갈한 나목을 닮았다. /이해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