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산(金陶山·1891~1921)이 연출한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는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다.
이 영화는 원래 극단 ‘신극좌(新劇座)’를 이끌던 김도산이 쓴 신파극이었다. 단성사 전속 변사였던 김덕경은 이를 일본 연쇄극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에서 영감을 얻어 연쇄극으로 바꾸어 보도록 권유한다.
연쇄극이란 영화와 연극을 결합한 형태로 ‘키노 드라마(Kino Drama)’라고도 부르며 영화와 연극이 서로 바뀔 때마다 호루라기로 신호를 보냈다고 한다. 이에 김도산은 단성사 사주인 박승필(朴承弼·1875~1932)을 만나 거금 5천 원을 투자받고, 이 영화를 만든다. 단성사에서 개봉된 ‘의리적 구투’의 입장료는 특등 1원 50전, 1등 1원, 2등 60전, 3등 40전으로 연극 관람표 40전에 비해 매우 비쌌지만 흥행에는 크게 성공했다.
이 영화가 만들어져 개봉된 10월 27일을 기념해 1966년 ‘영화의 날’이 제정됐다.
그러나 ‘의리적구투’는 연쇄극으로 온전한 형태의 영화는 아니었다. 극영화로서 최초의 무성영화는 1923년에 윤백남(尹白南·1988~1954)이 연출한 ‘월하의 맹세’를 꼽는다. 윤백남이 1924년에 연출한 ‘운영전’에 가마꾼으로 등장하는 배우가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1902~1937)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한 춘사는 1920년경 홍범도 장군 휘하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4년 ‘조선 키네마사’에 연구생으로 입사해 ‘운영전’에 이어 ‘농중조’에 출연하면서 배우로서 명성을 얻은 춘사는 1926년 ‘아리랑’을 제작함으로써 한국 영화계의 선구자로 주목받게 된다.
한편 ‘아리랑’은 춘사가 각본을 쓰고 감독과 주연까지 맡은 영화로 알려져 있지만 일부에서는 춘사가 아닌 쓰모리 슈이치(津守秀一), 또는 김창선(金昌善)이 감독했다는 설도 있다.
2006년부터 이천시로 이관돼 한국영화감독협회와 공동으로 설봉공원 대공연장에서 개최해 온 이천춘사대상영화제가 존폐위기에 놓여있다고 한다.
감독협회 관계자가 횡렴혐의로 경찰조사를 받는 등 영화제 운영과 관련한 비리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이천시로 넘어와 지난해 18회 영화제를 개최했음에도 여전히 바람 잘 날이 없는 걸 보니, 마치 춘사의 ‘임자없는 나룻배’를 보는 것만 같다. /이해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