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의 강압으로 조선군을 이끌고 청과 전투를 벌인 군장 헌명(박희순)은 약속했던 지원군이 오지 않아 처절하게 대패한다.
부상을 입은 부장이자 오랜 친구인 도영(진구)을 부축하고 눈보라 속을 헤매던 헌명은 눈 덮인 만주벌판 한가운데 전쟁 통에 아수라장이 된 객잔을 발견한다.
객잔 안에서 헌명과 도영은 전투가 끝나기도 전 전장에서 몰래 도망친 또 다른 조선군 두수(고창석)를 만난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강풍과 눈보라, 세 남자는 적진 한복판에 완벽하게 고립된다. 그러나 그들을 더욱 옥죄어 오는 것은 서로를 향한 살의의 기운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내뱉었던 한 마디 말로 헌명과 도영 사이의 엇갈린 과거가 드러나고, 서로의 본심을 눈치챈 것인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둘 사이에서 행여 탈영한 자신을 알아볼까, 누구 편을 들까 노심초사 하는 두수.
각자의 손에 장검, 단도, 도끼를 움켜쥔 채 헌명, 도영, 두수의 시선이 부딪히고 폭풍전야의 고요함 속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혈투의 순간이 다가온다.
조선시대가 배경이지만 조선이 아닌 만주의 치열한 전장에서 시작되는 ‘혈투’는 궁을 벗어나면서 우아함과 점잖음을 과감하게 버린다.
조선을 구하기 위한 영웅들의 전쟁이나 대의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대결이 아닌 덫에 빠진 세 남자의 혈투 속으로 온전히 돌진하는 스토리로, ‘부당거래’, ‘악마를 보았다’ 등을 쓴 시나리오 작가 박훈정 씨의 감독 데뷔작이다.
‘혈투’는 기존 시대극이 주를 이뤘던 화려한 볼거리 보다 인간의 내면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 내부자의 혈투, 전쟁의 혈투, 그리고 이 모든 혈투의 뒤에 감춰졌던 조선의 혈투를 펼쳐내면서 점차 스케일을 확대시킨다.
‘혈투’는 당쟁이 휘몰아치고, 임진왜란 후 민초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17세기 조선의 갈등구조를 세 인물을 통해 정형화했다.
특히 혈투가 시작될 수 밖에 없었던 각자의 과거가 시간의 역순으로 하나씩 하나씩 드러나는 구성의 묘미가 가미된 새로운 형식미로 신선한 충격과 긴박감을 더한다
완성도 높은 시나리오와 신예라고는 믿기 힘든 연출력이 결합된 사극 ‘혈투’로 박훈정 감독이 2011년 관객들의 뇌리에 확실한 자리매김을 할 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