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정월이 되면 습관이 하나 생긴다. ‘올해는 꼭 때를 맞추어 간장, 고추장을 담가야지’하며 날짜를 세는 일이다.
무심코 있다가 남들이 간장을 담근다고 하면 급하게 대충 장을 담그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며칠 째 화창하다. 경칩이 내일모레니 날씨로 보나 시기로 보나 간장 담그기에 좋은 때이다.
예전 엄마는 정월 그믐날이면 간장, 고추장을 담그셨다. 음력 정월 중에 말날이면 좋으나, 정월 그믐날이 손이 없는 날이어서 좋다고 하셨다.
그래서 내게도 해마다 정월 그믐날은 장을 담그는 날이다. 간장을 담그기 위해서 아침 일찍 서두르는 내게 무얼 도와주면 좋겠느냐고 묻는 남편에게 “집의 물보다 좋은 곳에 가서 좋은 물을 떠왔으면 좋겠네”하니 남편은 금방 어디론가 가더니 물을 세 통이나 떠왔다. 커다란 통에 물 두통을 쏟아 넣고는 시어머니 계신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올해는 지난해 간장이 꽤 남아 있어서 물 두말에 메주 다섯 덩어리만 하려고 하는데 소금을 얼마나 넣어야 될까요?” “넌 해마다 담그는 간장을 해마다 물어보니? 요즘은 소금이 조금 싱겁다고 하니 물 한 말에 소금 세 되는 해야 될 걸?” “네 어머니, 제가 그래요. 어째 해마다 헷갈리네요.” 은근히 웃음이 나온다. 어머니께 일부러 묻는 것은 ‘올해도 간장을 담그니 어머니도 참여해주세요.’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물 한 말에 소금 세 되 비율로 물 두 말에 소금을 체에 밭쳐서 물에 풀었다.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위에 비닐을 덮어 두었다. 한 나절이 넘어서 들여다 보니 소금물이 말갛게 가라앉았다.
전날 깨끗이 씻어서 옮겨놓은 항아리에 가라앉은 소금물을 고운 체에 밭쳐서 채워 넣고 메주를 띄웠다. 메주가 가라앉지 않고 소금물 위에 동동 뜬다. 불에 달군 깨끗한 숯과 빨간 고추와 참깨를 띄웠다. 혹시나 간이 약해 간장이 변할까 싶어 달걀 한 개를 띄우니 간장 위에 동동 뜬다. 달걀이 가라앉으면 간이 싱거워서 나중에 맛이 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간장은 완성 된 셈이다.
간장 항아리에 가득 찬 햇간장을 보니 마음이 든든하다.
“어머니. 간장 다 담갔어요. 보셔요.” 어머니는 창문을 열고 내다보시며 “그래 간이 잘 맞니?” “글쎄요. 어머니 하라고 하시는 대로 했는데요.” “그럼 달걀을 한 번 띄워 봐” “네.”
나는 이미 띄워 본 달걀을 한 번 더 띄워보여 드렸다. “되었구나.”하시며 창문을 닫아 버리신다.
간장이 제 맛이 다 들도록 이렇게 화장한 날만 됐으면 좋겠다.
항아리에 묵은 간장이 있어도 해마다 새 간장을 담그는 이유는 제사를 드리는 집은 간장을 해마다 담가야 하기 때문이다.
조상님들께 드리는 젯상에 묵은 간장보다 정성이 가득한 햇간장으로 올려야 하고 한 집안의 탄탄한 대물림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시아버님도 저 화창한 하늘 어느 곳에서 흐믓하게 큰 며느리의 간장 담그는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아이구, 우리 큰 며느리가 장 담그느라고 고생을 하는 구나’ 하시겠지? 당치도 않는 상상을 해보며 소금물로 얼룩진 항아리를 깨끗이 닦아낸다. 봄볕에 장독대가 반짝반짝 빛을 내며 대견스럽기만 하다. /이연옥 시인
▲ 한국문인협회 시흥시지부장
▲ 시집 <산풀향 내리면 이슬이 되고> <연밭에 이는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