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한동안 포근하던 끝이라 잠결에 들리는 빗소리를 단비려니 했는데 다음날 함박눈을 맞는 갓 깨어난 풀잎을 두고 계절은 매정스레 겨울로 돌아갔다.
회의 참석 후 남한산성을 지나오며 설경에 정신을 빼앗긴 채 구불구불 산길을 지나 북한강을 달리는 동안 햇살은 따뜻해 보여도 바람은 쌀쌀했고 강은 아직 결빙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차가 멈칫거리자 마음이 조급해진다. 강물도 유속을 잃는 지점에서 서서히 얼어붙었을 것이고 차도 속도를 잃자 도로위에 멈추었다. 자동차 전용도로를 질주하는 소음이 비웃 듯 머리 위로 지나가고 산뜻한 차림으로 달리는 자전거가 한 없이 부러웠다.
고속도로를 이용할 걸 괜히 올해의 마지막일지 모르는 설경에 정신이 팔려 고생이라고 푸념을 해가며 집이 가까워 갈 즈음 신호등 앞에 멈췄다. 다른 사람들은 다 건너고 허리가 많이 굽으신 할머니께서 혼자 불안하게 걸음을 옮기고 계셨다. 이내 보행자 신호가 깜빡거리고 늘어선 차들은 더 이상의 머묾을 용납하지 않을 기세다.
차에서 내려 부축해 드리자 연신 고맙다고 하시는 할머니를 자세히 보니 아는 분이어서 차에 모셨는데 병원에 가시는 길이라고 하시며 어서 죽어야지를 연발하신다. 도시의 길은 늙은 육신에게도 가속을 요구 하는 곳일까.
겨우내 불어난 체중에 마음이 쓰여 집을 나섰다. 몇 해 전부터 주민자치센터로 명칭이 바뀐 면사무소 옆 제방을 따라 걸으면 마음까지 상쾌해 지는데 인라인 스케이트를 즐기는 아이들과도 마주치게 되고 차량통행이 빈번한데다 밤이면 외등이 없어 불편했다. 지자체에서 주민 건강증진을 위해 체육공원을 조성하고 지압 산책로를 만들어 맨발로 밟도록 했는데 어르신들은 발바닥이 아프다고 학생들이 신는 실내화를 신고 걸으셨다. 내가 웃으면서 실내화를 신고 걸으시면 운동 효과가 없으니 맨발로 하시라고 해도 소용이 없으시고 여전히 실내화를 신으신다. 그 바람에 신발가게가 바빠지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날씨가 추워지면서 그마저도 시들해졌다. 체육공원에 있는 산책로는 폐타이어 포장이라 약간의 탄력이 있긴 해도 같은 길이 반복되는 지루함 때문에 잘 찾지 않게 된다.
기존의 산책로 건너편 제방에 황토를 깔아 산책로를 새로 만들었다. 여름날 아침 맨발로 황톳길을 걸어보니 지금까지의 걷기 운동과는 전혀 다른 말 그대로 잠자는 세포들이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틈만 나면 황톳길을 걷는다. 소식이 뜸했던 사람들 얘기와 비상하는 백로의 날갯짓, 도란거리며 피어나는 들꽃과 하루의 노동을 마무리하는 겸손한 일몰을 선물 받는다. 나에게 무슨 공로가 있다기에 이런 호사를 누리는지 눈물겹도록 감사하건만 손수 가꾼 채소를 나누어 주는 정겨운 인심도 이곳에서 만난다.
길은 사람의 발길이 모여 만들어졌건만 이제는 사람에게 위험한 곳이 되었다. 이동의 수단으로 자동차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긴 해도 무엇보다 우선 돼야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안전하고 편리해 통행을 넘어 소통이 이루어지는 길을 생각하며 봄을 기다린다. /정진윤 시인
▲ 가평 출생 ▲ 한국 문인 협회 회원 ▲ 한국 작가 신인상 수상 ▲ 가평 문학상 수상 ▲ (現)가평 문협 사무국장 ▲ 플로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