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중반 서울 무교동 뒷골목에 ‘세시봉’이란 경음악감상실이 있었다. ‘세시봉(C'est Si Bon)’이란 불어로 ‘매우 좋다’는 뜻이다. 당시 세시봉에는 ‘대학생의 밤’이라는 정규 프로그램이 인기였다.
사회는 홍익대 미대생이던 이상벽이 맡았다. 이 무대에 서울대 음대에 다니던 조영남이 올라가 피아노를 치며 현제명의 ‘고향생각’을 부른다. 앙코르가 터져나왔다. 팝송 ‘돈 워리’로 화답한 조영남은 그 자리에서 일약 세시봉의 스타로 떠오른다. ‘대학생의 밤’에 출연해 인정을 받으면 세시봉을 공짜로 출입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당시 세시봉 입장료는 25원이었다. 자장면 한 그릇값이 15원 하던 시절이었다. ‘대학생의 밤’에 단골출연자가 돼 노래를 부르면 출연료 대신 주인을 따라 나가 무교동 비지백반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어느 날, 남루한 차림새에 낡은 기타를 둘러멘 젊은이가 세시봉에 나타난다. 청년은 ‘대학생의 밤’ 무대에 올라 도니체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중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부른다. 그 노래를 들은 조영남은 속으로 중얼거린다. ‘아. 강적이 나타났구나.’ 송창식이었다.
이렇듯 세시봉은 자타가 공인하는 1960년대 청바지 통기타문화의 산실이었다. 이백천 조용호 피세영 정홍택 서병후 박상규 장우 이상벽 최인호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전유성 이장희 고영수 윤여정 등이 모두 세시봉 출신이고, 이들은 훗날 모두 유명해졌다.
지난해 말 한 방송사가 기획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세시봉 열풍’이 멈출 줄 모른 채 계속되고 있다. 가히 ‘세시봉 신드롬’이라 할 만 하다. 방송 출연을 계기로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은 지난 달부터 전국순회공연에 나섰다. 22개 지역 46회에 걸친 이번 공연은 다섯 번째인 지난 4일 대구공연까지 전석이 매진돼 지금 기세대로라면 전회 매진도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뿐만 아니다. 통기타 열풍도 한몫을 해 한 때 낙원상가 악기점들의 재고가 바닥나기도 했다. 인터넷 쇼핑몰의 판매량도 3배 가량 늘어났고, 제조회사의 주가(株價)도 덩달아 뛰었다. ‘세시봉 효과’다.
아날로그적인 향수를 자극하는 ‘세시봉 콘서트’는 세대의 벽마저 단숨에 허물어버렸다. 서머싯 몸은 ‘노년기를 견디기 힘들게 만드는 것은 정신적 육체적 기능의 쇠퇴가 아니라 추억의 무거운 짐’이라고 했다. 어느덧 환갑을 훌쩍 넘어선 나이지만 ‘추억의 무거운 짐’을 함께 해주는 이들이 있어 기분이 ‘매우 좋은’ 대한민국이다. /이해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