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내자동에서 통의동을 지나 통인동 창성동 사이를 거쳐, 자하문 세검정으로 넘어가는 도로 이름이 ‘추사로(秋史路)’다.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에서 추사로를 따라가다 보면 차도 옆으로 작은 표석(標石)이 눈에 띈다. 1987년 서울시가 세운 이 표석엔 ‘골목 안 약 50m 지점 백송이 있는 창의궁 터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선생이 태어난 집터’라고 돼있다. 백송은 바로 천연기념물 제4호인 통의동 백송(白松)이다. 백송은 충남 예산의 추사고택이 있는 용궁리(龍宮里)에도 있다. 추사가 24세 때 동지부사인 생부(金魯敬)를 따라 중국에 다녀오던 길에 가져와 고조부 김흥경(金興慶)의 묘 옆에 심었다고 전한다.
창의궁(彰義宮)은 영조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잠저(潛邸)다. 그리고 영조의 부마인 추사의 증조부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에게 줬다. 그곳이 추사의 서울 집으로 백부인 김노영(金魯永)에게 입양돼 월성위가의 가계를 잇게 된다. 지금의 추사고택이 있는 충남 예산군 용궁리는 영조가 월성위가에 내린 별사전(別賜田)이다. 이곳에 충청도 53개 고을(郡縣)에서 한 칸씩을 부담해 53칸의 집을 지었다. 통의동 표석대로라면 추사의 탄생지는 서울 집인 월성위궁이 된다. 그러나 그의 향저(鄕邸)가 있는 용궁리에 전하는 추사 탄생과 관련한 일화로 볼 때 예산서 태어나 서울로 간 것으로 보인다.
1791년 월성위궁 앞을 지나던 좌의정 채제공(蔡濟恭,1720~1799)은 여섯 살 추사가 쓴 입춘방(立春榜)을 보고 생부인 김노경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아이는 명필로 일세에 이름을 드날릴 것이나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그것이 마음에 걸리네.”
추사는 55세부터 63세까지 제주도 유배와 66세부터 67세까지 함경도 북청 유배를 마치고 71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말년을 과천의 별서(別墅)인 과지초당(瓜地草堂)과 뚝섬 봉은사를 오가며 보냈다.
봉은사 장경각에 걸린 ‘판전(板殿)’이라는 글씨는 추사의 마지막 작품으로 전한다. 한승원은 소설 ‘추사’에서 ‘판전’을 쓰기 위해 고뇌하는 추사의 모습을 소상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 글씨를 쓰고 사흘 뒤 세상을 떴다고 한다. 과천시가 이러한 추사와의 인연으로 지난 2007년 주암동에 과지초당을 복원하고 백송을 기념식수한데 이어 내년 6월 준공을 목표로 추사전문박물관을 건립한다고 한다. 추사를 일목요연하게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안병현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