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흐름을 살 같다 했는가? 많은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 어느 새 이순을 훌쩍 넘겼다. 젊은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먹지 않아도 좋을 나이는 어찌 그리도 빠짐없이 챙기고 살았는지….
착하고 고운 모습이 좋아 만나서 결혼한 후 마누라 늙어가는 줄 모르고 무심하게 지내고 말았음을 생각하니 염치 없다. 그래도 34년간 한해도 거르지 않고 짙은 향 곱게 번지는 노란 후리지아꽃이나 탐스런 장미 다발을 배달시켜 작은 감동을 주었고, 가끔씩 금, 은색 포장으로 그놈의 결혼기념일만은 꼬박꼬박 챙겨주었으니 요즘 세상 어느 누가 그리도 자상하게 마누라 미소 짓게 만들었냐며 스스로를 자위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강산이 세 번씩이나 바뀌는 서른 해를 그렇게 행복한 가장으로만 살지 않아 면구스럽다. 시집와서 홀시어머니 모시고 거기에 자그마치 셋씩이나 되는 시누이 상전 모시듯 살아야할 처지에서 온종일 집안 살림에 갓난아이와 씨름하다 지쳐 겨우 잠들면 사흘이 멀다하고 야밤에 친구들 떼거리로 몰고와 술상 차려달라는 철부지 남편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으리라.
아내의 잠든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 고운 얼굴은 어디가고 웬 할멈 하나가 누워 있다.
누가 만들어준 인생 계급장인지 하나 둘 그리고 잔주름까지 예전의 그 모습과는 딴판이다. 가슴이 미어짐을 억누르고 있자니 그간의 일들이 떠오른다. 수고한 댓가를 바란 것도 없이 삼십 여년을 나와 자식들 그리고 가정을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희생하지 않았는가. 삼십 년 시집생활 중 13년 간 자신을 낳아주지도 않은 반신불수와 말년에는 치매를 앓던 시어미를 모시고 살아온 숭고한 아내를 어찌 이리도 무관심 속에 살았을까?
말은 하지 않았어도 무수히 박아 놓은 가슴 깊은 곳의 상처는 또 얼마나 많았을까?
얼마 전 아내를 위해 녹용과 자라 등을 처방한 한약재를 사다주었다. “당신이나 드시지, 왜 나를 줘요?” 하기에 “난 보약 싫어하잖아“ 하였는데 그게 걸렸는지 제주여행 다녀오며 60여만 원짜리 보양제를 내게 내민다. 참 어쩔 수 없는 여편네다.
신인문학상과 공모전 등 심사비 몇 푼을 모아두었다가 커플 금반지를 구입해 건넸더니 한참을 웃는다. 우리 부부는 매월 두세 번 커플 석을 예약해 영화를 본다. 연애시절 이후 좀처럼 없던 일이기에 아내는 어쩌다 한번이겠지 하던 것이었지만 벌써 4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
5월에는 아내의 회갑이다. 오늘 5박 6일간의 태국 파타야 여행예약을 마쳤다. 젊은 날의 아내 닮은 꽃 활짝 피는 오월에는 그곳으로 가야지. 마누라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어나도록….
사는 게 다 그렇다. 웃을 수 있는 일이 많아지면 그게 행복이지 아니한가. 얼마 남지 않은 둘만의 여정을 함께 가야겠다. 나의 눈은 회한의 눈물이 나고 마누라의 눈에는 환희의 눈물이 나도록…. 비록 때늦은 출발일지라도 한곳을 향해 둘이서 간다는 것, 그 길이 반려자요, 동반자며 영원한 친구 같이 정을 나누는 동행이라는 길을 떠나고 싶다. 두 손을 꼬옥 잡고 생을 마칠 때까지…. /임상호 시인
▲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서정문인협회 이사 ▲ 시집<별 이야기> <청호동 연가>(공저) <옹달샘> 등 다수 ▲ 광명신협 부이사장 ▲ 프리랜서 아트디랙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