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향한다. 서둘러 준비한 도시락을 챙겨 두어 시간 달려 다다른 곳, 서해안의 끝자락이다. 만리포 해변을 끼고 돌면 수십만 평방미터의 수목원이 천리포를 감싸고 있다. 늪지에 허리를 반쯤 담근 느티나무에 푸른 물이 오르고 목련이며 진달래 등이 제 몫의 계절을 읽어내느라 분주하다. 어디쯤에선가 비둘기 알 품는 소리가 산을 깨우고 출항 준비를 끝낸 고깃배에 올라탄 진달래 향이 바다를 향해 붉은 질주를 시작할 것 같은 곳이다.
파도처럼 출렁이는 보리이삭 사이로 백리포라고 쓰인 낡고 허름한 팻말을 본 후에야 다른 포구를 지나고 있음을 알아챈다.
한때 이곳도 기름 유출로 몸살을 앓았던 곳이다. 먹빛이 된 바다와 돌 틈에 낀 기름을 닦아내는 손길로 분주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그때의 상처를 잊은 듯 바다는 평온하고 돌을 들척일 때마다 화들짝 달아나는 작은 게들이 바다가 살아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을 듯 고요하고 평온한 곳. 아직은 쌉싸롬한 바람이 옷자락을 여미게 하지만 파도가 곱게 다듬어 놓은 모래에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쓰고 누군가는 소망을 쓴다. 밀물이 들면 바다로 옮겨질 희망을 서둘러 쓰는 이들, 자연과 동화되고 자연 속에서 천진해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기름유출의 현장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아직은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 많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점이 남아있어 우리를 안타깝게 하지만 햇살을 받아 말갛게 반짝이는 돌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잠깐의 부주의가 얼마나 큰 재앙으로 돌아오는지를, 그리고 작은 힘이 모여 얼마나 큰 기적을 이루어 내는지 우리는 기름유출을 통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십리포, 막 선회를 마친 산 까치 한 마리 봄바람을 털어내며 목책에 앉는다. 비포장 길로 접어든 차량은 흙먼지를 날리고 비경에 연실 감탄사를 토해내는 사이 엉덩이 다 깨진다는 뒷자리 누군가의 즐거운 비명이 생강꽃처럼 노랗게 터져 나온다.
작은 산맥을 중심으로 나뉜 바닷가 둔덕 아래로 펼쳐진 풍광이 마음을 잡는다. 화강암으로 된 기암절벽과 웅장한 듯 화려한 모습이 제주도의 모형 같다. 하지만 오래 전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의 신비와 설렘은 없다. 잘려진 나무와 파헤쳐진 길 그리고 들어서기 시작한 문명의 흔적들이 이곳에도 개발이 시작됐음을 알린다. 처음 왔을 때의 기억을 십리 밖으로 물리며 일리포로 향한다.
초소를 중심으로 바다가 연결된 곳, 군사지역으로 한때는 출입금지 구역이었고 지금은 쇠사슬만 말뚝에 걸쳐진 채 녹슬고 먼 뱃고동 소리가 이 곳을 들렀다 갈뿐 한적하다. 몇몇은 낚싯대를 드리우고 저 만치 바위에는 일리포를 화폭에 담는 이가 있어 한낮의 정취를 더해준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한 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일이거나, 모래사장에 누워 철지난 유행가 한 소절에 마음에 내려놓는 일이거나, 준비해간 커피 한잔에 취해 바다에 젖어보는 일 모두가 사월에 할 일 들이다. 만리포 지나 백리포 그리고 십리포에서 일리포까지 어쩌면 이곳에서부터 시작됐어야 할 길들을 반대로 거슬러 온 것은 아닐까. 파도에서 일탈된 치어들이 튀어오르는 바위섬에 올라 생각의 깊이를 철썩여 본다. /한인숙 시인
▲한국문인협회 회원 ▲평택문인협회 회원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2006년) ▲시집 <푸른 상처들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