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경안천은 참 맑았다. 경안천 냇가에서 자란 나는 그 곳이 주요 놀이터였다. 방학이나 휴일은 늘 냇가에 가서 살았다. 여름에는 멱을 감고 겨울에는 썰매를 탔다. 봄볕이 흙 속으로 녹아 들 무렵이면 하루 종일 강변을 돌아다녔다. 모래사장과 자갈밭 사이에 물떼새의 알이 놓여 있어 새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급한 우리들은 물고기를 잡고 다슬기와 말조개를 주웠다. 물 밑의 돌을 들추면 징거미새우, 미꾸라지, 모래무지 등 ‘물반 고기반’이었다. 맨손으로 움켜 잡았다.
장마철 홍수가 나고 사나흘 지나면 사납게 소용돌이 치며 흘러내리던 냇물의 흙탕물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해가 뒷산에서 두 뼘 정도 올라오면 우리들은 개울가에 모여 강물을 헤엄쳐 건넜다. 센 물살 때문에 물도 몇 모금씩 들이키면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강 건너기를 몇 번 하고 나면 하루해가 저물었다. 강 건너 넓은 들에는 이른 봄부터 기름종이를 고깔처럼 씌워 가꾼 수박 참외가 끝없이 줄지어 익어 갔다.
겨울이 되면 손을 호호 불면서도 냇물이 얼었다 싶으면 재빨리 썰매를 메고 나왔다. 날카로운 날을 박아 넣고 선 자세로 타는 외발썰매는 대단한 속도를 자랑했다. 한참 달리다가 목적지에 다 왔을 땐 발뒤꿈치에 힘을 주면서 앞부분을 들면 ‘지지직~’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위험도 늘 머리 뒤에 붙어 다녔다. 어느 해 겨울 새로 장만한 신병기를 메고 친구들과 같이 얼음판으로 들어갔다. ‘쩡쩡’ 얼음 조이는 소리가 나면서 제법 단단해 보였다. 신나게 썰매를 타고 1km 정도 떨어진 보(洑)를 향해서 냇물 한가운데 바닥이 퍼랗게 보이는 깊은 곳까지 갔다. 아뿔싸! 깊은 곳은 살얼음이었다. ‘으지직~’ 빙판이 여기저기 금이 가고 깨지기 시작했다. 썰매와 함께 물에 빠졌다가 간신히 얼음판 위로 올라와 살았다. 어른들은 몇 년에 한 번씩 보(洑) 막기를 했다. 보(洑)는 동네 아래쪽 들판이 시작되는 곳에 강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른 봄 농사철이 되기 전에 어른들은 보 위쪽의 냇물바닥을 파서 물이 늘 풍부하게 고일 수 있도록 하고 지난 장마 때 떠내려간 돌을 다시 쌓았다. 봇도랑으로 연결되는 자리에는 필요한 때 물을 댈 수 있도록 수문을 설치하는데 그 곳을 고쳐 쌓을 땐 메기, 뱀장어 같은 1급 어종이 수두룩하게 잡혔다. 그런 날 어른들은 천렵하느라 하루가 모자랐고 양조장 자전거는 불이 났다. 장마가 끝나면 방천을 만들고 다리를 놓았다. 홍수가 나면 냇물 가에 붙은 논밭의 유실을 막기 위해 밤나무같이 단단한 나무로 버팀 구조 목을 세우고 돌을 쌓아 방천을 만드는데 시원한 날을 골라 여름내 부서지고 흩어진 방천을 보수하고 나무기둥과 서까래, 뗏장을 이용해 흙다리를 놓았다.
방천 옆도 물이 깊었다. 그 곳은 아낙들의 여름밤 수영장이었다. 가끔 수상한 나무꾼이 날개옷을 훔쳐 갔고 그 해 가을추수가 끝나면 결혼식이 열리곤 했다.
경안천과의 꿈같은 날들은 고등학생이 되면서 종언을 고했다. 아버지께서 이천군 율면의 한 초등학교장으로 전임되셨고 나는 대학입시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서 광주시내로 거처를 옮겼기 때문이었다. 그 후 세월이 흘렀고 80년대 초 모처럼 친구들과 같이 옛 생각을 하며 냇물엘 들어가 보니 이미 경안천은 옛날의 그런 물이 아니었다. 에버랜드의 전신인 중앙개발에서 1만 두가 넘는 돼지를 사육하며 나온 분뇨를 그대로 경안천으로 흘려버려 분뇨가 10cm 정도 두께로 강바닥에 쌓여 아무 것도 할 수없었다.
2000년 대 11월초 양벌리로 다시 이사 와 냇가에 가봤지만 그 옛날의 경안천은 아니었다.
다행히 경안천을 살리자는 시민운동이 일어나 20년의 긴 세월 동안 오폐수를 감시하고 강력한 행정조치를 계속한 덕분에 수질은 상당히 좋아졌다. 제안하건데 한 여름 경안천에서 축제를 열었으면 좋겠다. 시장을 비롯한 VIP들이 정장을 입은 채로 물에 빠지고, 물속에 감춰진 보물찾기 등을 즐기는 축제를 만들면 더 깨끗한 물에서 놀고 싶은 마음에 자연스럽게 수질도 정화되고 감시활동도 강화될 것 아닌가. /김환회 새마을운동 광주시지회장, 광주시문화원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