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곧기는 뉘시기며 속은 어이 비었느냐/저렇게 사시(四時)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 제5수에 나오는 시절(詩節)이다. 최근 어떤 이가 통행을 방해한다고 길모퉁이에 심어진 2~3그루 대나무를 베어서 산림법 훼손으로 곤욕을 치루는 사례를 보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대나무는 강직한 선비의 상징이다.
일생 동안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을 갖고 있다는 것은 무거운 짐도 되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인생이 한없이 설레고 긴장의 연속이라 삶 자체가 지루하지는 않을 것 같다.
삼국유사 제 2권 ‘경문대왕조’에는 우리가 잘 아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에 대한 글이 나온다. 당나귀 귀 같은 임금의 귀를 보고 발설하고 싶은 복두장인의 욕망은 굉장했나보다. 이런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지만 그 발설 내용이 당사자의 명예와 관련됨은 물론 자칫 발설자 자신의 목숨과 직결되기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 대나무 숲에 가서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발설하고 말았다. 문제는 대나무다. 대나무는 강직한 선비의 상징이다. 임금 즉 권력자의 숨기고 싶은 비밀을 여과 없이 세상을 향해 고변(告變)한다. 때는 바람 불 때다. 사회에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불 때, 대나무는 권력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다.
그런데 참 묘한 이치(理致)는 이제나 그제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자신의 약점을 무조건 은폐하려 하는 것이 권력자의 타고난 습성인가 보다. 대나무 숲에서 울리는 소리를 차단하고자 대나무 숲을 베어버린다. 즉 잘못된 세상을 비판하고자 했던 강직한 지성(知性)을 무참히 짓밟는 꼴이다. 언로(言路)를 틀어막고 진실을 은폐하고 사실을 왜곡한다. 당시 임금이 선택한 것은 대나무 대신에 ‘산수유’다. 그것으로 대체한 숲에선 바람이 불 때에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가 아니라 ‘우리 임금님 귀는 길기도 하다’였다. 그래서 임금의 노여움이 가셨다.
대나무나 산수유가 전하는 요지는 ‘임금님의 귀가 길다.’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복두장인에게 전해들은 대나무는 왕의 귀를 당나귀로 비유를 했고, 아마도 그 함의는 왕의 결점을 포함하고 있는지 모른다. 임금에게 선택받은 산수유는 귀가 길다는 사실만을 전했다. 비유는 주관적 판단이 작용한다. 비유적 비판은 통쾌할 때도 있다. 그러나 상대의 공격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참하게 베임을 당할 수도 있다.
청각기관으로 귀는 이해를 의미한다. 그러니 귀는 커야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임금의 귀는 커야 한다. 그래야 백성의 말을 귀담아 듣고 정치를 잘 할 것 아닌가. 그런데 귀가 길다는 것은 조롱의 대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당나귀 귀처럼 길기만 할 뿐 불통이기 때문일 것이다. 임금은 이해가 부족하여 자신이 당나귀로 취급받는 것에 불만이 많다. 그러나 그 임금은 귀는 있으되 귀담아 들으려는 큰 귀가 아닌, 길기만 한 귀를 가졌을 뿐이다.
산수유도 임금이 자신을 선택했지만 임금을 평가하는데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역시 임금의 본질은 소통이 아니고 불통임을 밝힌다. 우리가 사회란 숲에서 대나무로 살 것인가 아니면 산수유로 살 것인가 하는 것은 선택이지만 문제의 본질 내지 사건의 핵심은 진실에 있고 사실에 의거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진춘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