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꽃이 한창이다. 살랑 이는 봄바람을 맞으며 미용실로 향했다. 차례를 기다리는데 두 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한 모녀가 들어선다. 내 옆에 앉은 그들은 오순도순 정담을 주고 받더니만 나중엔 무슨 일인지 딸에게 부탁을 한다.
네가 원하는 예쁜 옷을 두 벌이나 사줬으니 제발 방 좀 깨끗이 치우고 살라고…. 사정을 하는 투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우리 집 생각이 나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얼마 전 일이다. 친정엄마 생신이 3월이어서 대구에 다녀왔다. 며칠 간 집을 비워야 했기에 걱정이 돼 딸에게 여러 가지 주문을 했다. 보일러는 밤에만 켜고 아침에는 꼭 끌 것, 현관문은 잘 잠그고 일찍 귀가할 것 등…. 말은 친정엄마 생신 차려 드린다고 내려갔지만 생신상은 음식점에 예약했고 생일케이크는 제과점에서 사 들고 와 촛불 꽂고 축하노래를 불렀다.
이런 딸에게 친정엄마는 그저 내려와 준 것이 고마워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번지시고 손수 지으신 따뜻한 밥을 먹이신다. 휴식을 취하고 돌아오는 날엔 아직도 아삭하고 맛있는 김장김치며 찹쌀, 또 사위가 좋아한다고 집에서 만든 떡을 정성스레 싸주신다. 차 안이 엄마의 사랑으로 가득하다.
그 사랑을 받고 오면서 눈물이 났다. 저녁 무렵 집에 도착했다. 딸은 아직 오지 않았고 기다리는 건 일거리들이었다. 주방엔 그릇들이 쌓여 있고 무엇보다 딸의 방문을 열었을 때 온통 난장판이었다. 이리저리 엉켜있는 옷가지들, 뱀이 허물 벗 듯 발만 쏙 뺀 스타킹, 구석에 쳐 박힌 이불, 널린 책들…. 이걸 그냥 놔둘 까 치울 까 고민하다 결국 또 어지러운 방을 청소했다. 딸은 방실방실 웃으며 밤 늦게 돌아왔다..
자기 방이 깨끗이 치워져 있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그저 외할머니랑 재미나게 지냈냐고만 묻는다. 그런 딸에게 “네 방을 보고 느낀 게 없냐, 네 방은 네가 치우고 정리정돈을 해야지, 어지러워서 어떻게 할래” 했더니,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엄마, 나는 귀한 딸이잖아. 언제 내가 청소랑 빨래를 해 봤어야지”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해봤어야지….
그런데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 말, “야! 어떤 년은 처음부터 청소하고 빨래했냐? 나도 귀한 딸이었어.” 그 일이 있은 후에도 딸의 방은 여전히 전쟁터를 방불케 해 하는 수 없이 내가 청소를 했다. 어느 날, 딸의 방문을 열고 컴퓨터에 열중해 있는 딸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딸이 하는 말 “울 엄마 또 어떤 년 나오게 생겼네.” 크~으 어떤 년!
시집 오기 전까지 나도 청소도 밥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친정엄마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껏 살림만 잘(?)하고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 딸도 그럴 것이다. 엄마와 딸의 관계는 묘하다. 싸울 때는 너무 밉고 돌아서면 이해가 되는, 때론 친구처럼 때론 연인처럼 서로 의지가 되고 비밀도 공유한다.
무엇보다 이 험하고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야무지고 똑똑하게 제 몫을 다 해내는 내 딸이 대견스럽다. 세상의 엄마라는 존재는 참으로 숭고하고 위대하다. 결혼을 하고 나면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자식을 낳아보면 친정엄마의 존재는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지금껏 내가 행복한 것은 우리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딸에게 바라건대 이 엄마가 있어 딸이 행복했으면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딸들이 행복하길 바란다. /김영희 시인
▲ 한국문학예술 신인상(포스트 모던)으로 시인 등단(1998년)
▲ 한국문인협회 회원
▲ <그녀가 웃어요!> <스물넷의 가을> <사랑을 입금하다>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