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사가 물을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이 되는 것처럼 지혜롭게 배우며 깨달음(菩提)을 이루지만 문자나 말에 얽매여 어리석게 배우면 생사(生死)에 빠진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이 지은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에 나오는 말이다. 지눌 보조는 조계종의 종조(宗祖)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국근대불교사의 복잡한 이면(裏面)이 있다. 원래 종조는 태고(太古) 보우(普愚,1301~1382)였다. 오늘날 한국불교를 논할 때 그 전환기적 시점을 광복 이후 1950년대, 이른바 ‘교단정화운동’에서 찾아야 한다. 고불총림(古佛叢林)인 백양사(白羊寺)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만암(曼庵, 1876~1956)스님은1954년 조계종 종정에 올랐으나 당시 정화파의 강경세력이 종조를 태고 보우에서 지눌 보조로 바꾸자 ’환부역조(換父易祖)’한 무리들과는 함께 할 수 없다며 종정자리를 박차고 백양사로 내려갔다. 어쨌거나 보조국사의 가르침은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과 더불어 출가자들을 경계하고 있다. 문제는 ‘아만심(我慢心)’이다. 출가자가 먼저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버려야 하는데도 그렇지 못한 몇몇 때문에 종종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한다. “불교는 화합승단이 근간이다. 그런데도 각방결사하면서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정당한 비판을 고맙게 받아야 하는데 대접 못 받으면 불평불만만 하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대중생활과 자자포살(自恣布薩)이 살아나야 한다.” 만암의 제자인 수산(壽山) 스님의 말이다.
출가수행자의 생활방식은 부처님 당시부터 네가지 형태로 실천됐다. 첫째는 걸식으로만 음식을 얻어먹었다. 둘째 남이 버린 베조각으로 옷을 해 입었다. 셋째 지붕이 있는 곳에서는 잠을 자지 않았다. 마지막 넷째로는 소의 똥 오줌으로 만든 약만 사용했다. 이를 일러 ‘두타행(頭陀行)’, 즉 고행이라고 한다. 고행은 청빈한 수행을 말한다. 부처님 당시 두타행의 제일은 마하가섭(摩訶迦葉) 존자(尊者)였다.덮는 이불을 ‘여읠 리(離), 부처 불(佛)’이라고 해서 이불(離佛), ‘부처를 여읜다’고 했다. 지붕이 있는 곳에서 이불을 덮고 편안히 자면 공부와는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음을 경계하는 뜻이다. 종교가 너무 속세의 일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며 권력 지향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요즘이다. 등 따습고 배부르면 그야말로 도로아미타불이다. 불기 2555년을 맞아 사부대중(四部大衆) 모두가 앞서 말한 물의 쓰임과 이불의 참뜻을 가슴에 새길 필요가 있다./이해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