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시 무렵 버스에 오른다. 퇴근시간과 중 고등학생들 하교 시간이 맞물러 버스 안이 혼잡하다. 시장바구니를 든 여인부터 서류가방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가장, 하루의 일과를 쏟아내는 학생들의 수다로 시끌하다. 맨 뒷 좌석의 남학생 한 무리가 유독 시끄럽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쏟아내는가 하면 서로 치고 받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쉴 새 없이 장난인지 싸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난폭하다. 가끔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그 사이로 일행의 웃음이 차 안에 흥건하게 고여 들기도 한다. 거침없이 쏟아내는 휴대전화 속 이야기들. 버스에 남겨놓은 자신의 전화번호와 낙서등 주변의 상황엔 전혀 개의치 않은 모습이 때론 안타깝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고3인 학생이 컴퓨터 게임만 한다는 어머니의 꾸지람을 견디지 못하고 본인이 사는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식과의 다툼 끝에 차라리 나가 죽으라고 어머니가 윽박지르자 그 길로 뛰쳐나가면서 죽을 테니 잘 살라는 문자를 보냈고 어머니 역시 화가 치밀어 그래 죽어라 라고 문자를 보낸 후 바로 쿵 소리가 났고 그것이 아들을 저 세상으로 보낸 마지막이었단다. 자식을 그렇게 보낸 어머니의 심정이 어땠을까. 참으로 안타깝고 기막힌 일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 흔히 있을 수 있는 갈등이고 다툼에 설마 자식이 그런 일을 저지를 거라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공부하기 싫어하면 공부시키지 말고 게임을 한다면 게임하게 놔뒀으면 죽지는 않았을 거 아니냐며 비통해하는 할머니의 절규에서 세상은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
우리보다는 내가 우선인 세상, 나만의 영역을 만들고 그 틀을 지키고 싶어나는 아이들을 지켜내는 일이 쉽지는 않다. 부모와는 다른 잣대와 유전자를 들이대며 소통의 부재를 토로하기도 하고 급한 마음과 초조함으로 세상 밖을 넘보기도 한다. 아직은 낯설고 어울리지 않는 기성의 문화를 꿈꾸는 그들에게 올바른 삶의 방식을 일깨워 주는 일, 긍정적 사고로 세상을 보게 하는 일. 개성과 자신감으로 인성을 바로 세울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때이기도 하다.
이런 그들의 탯줄을 끊어 세상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서는 부모에게 맞는 맞춤식 꿈과 기성세대의 이기심을 들이대서는 갈등만 키울 뿐이다. 진정으로 그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깨우치고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주는 역할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자식에 대한 욕심보다는 하나의 인격체로 홀로 섰을 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지는 그런 사람다운 사람으로 키우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대중 속에서 호흡할 수 있는 젊은 이, 나만이 아닌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그 문화에 동참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소란을 피우던 학생들이 빠져나간 버스 안은 다시 조용해졌지만 수런거림이 그 자리를 메웠다. 뉘 집 자식인지 참 버르장이 없이 키웠다며 커서 무엇이 되려고 저 모양인지 하며 혀를 차는 모습에서 어른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저 아이들이 기성세대의 숨겨진 모습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몫을 젊은이의 탓으로 떠넘기는 것은 아닐까, 눈높이를 맞추고 소통하는 일이 중요한 때다. /한인숙 시인
▲한국문인협회 회원 ▲평택문인협회 회원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2006년) ▲시집 <푸른 상처들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