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순원 씨의 <어머니는 왜 숲 속의 이슬을 떨었을까>에서 “어른이 된 뒤에야 그때 어머니께서 떨어주시던 이슬떨이의 의미를 깨닫게 됐다. 아마 그렇게 떨어내주신 이슬만 모아도 내가 온 길 뒤에 작은 강 하나를 이루지 않을까 싶다.”라는 회상한다. 어머니는 기꺼이 저자의 아들과 함께 인생의 동행이 돼 아들이 봉착한 수많은 고비마다 이슬받이가 돼 주셨다. 이 글에서 동행은 어머니의 무한한 자식 사랑이다.
얼마 전 아주 오랜 만에 해후(邂逅)한 친구가 있었다. 아마도 강산이 한 번 변한 것 같다. 3시간 가량 걸리는 산행을 함께 동행했다. 온 산이 연녹색으로 푸른 피를 분출하는 가운데 울긋불긋한 산 벚꽃은 군데군데 점령해 자신의 존재를 뽐내고 있었다. 산은 바야흐로 색의 향연(饗宴)을 펼쳤다. 그 기운에 흠뻑 취해 한 치도 못되는 마음은 무량의 도량을 이뤄 장강이 됐다가 태산이 되기도 하고 사해를 둥둥 떠다니다가 수미산 정상에 구름이 돼 걸터앉은 듯 막힘과 거침이 없었다. 그 어떤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바람의 방향에 민감할 필요도 없는 그저 그냥 고요한 평정의 바다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이 친구도 자연의 합창인 무언(無言)의 교향곡을 짐작했는지 이야기 보따리를 한 없이 풀어놓았다. 나중에 어떻게 저것들을 어찌 다 주워 담으려나 은근슬쩍 걱정도 됐으나 그럴수록 친구의 말을 진지하게 열심히 들어주었다. 독특한 종교관을 가졌다고 시댁에서 왕따 됐던 친구의 이야기, 상식이 통하지 않는 현실에서 좌절해 아내와 의절하며 지낸다는 죽마고우의 이야기, 한마디로 사랑의 상처 때문에 깊은 우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누에의 실처럼 뽑아냈다. 야릇한 넋두리들을 들어주면서 나는 그 친구의 자세에 한없는 연민과 왜 자신과 상관없는 친구의 이야기를 저리도 열심히 화술(話術)연주를 할까? 궁금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요 어디쯤이 허구일까? 의문의 똬리를 품고 있었는데, 이 친구는 ‘아이고, 속이 다 후련하다야~’하는 것이 아닌가.
친구는 세상의 병중에 우울증이 가장 무섭다고 했다. 저승사자(使者)가 사신을 끌고 오는 것도 보였다고 했다. 이 말을 산중에서 들으니 등골이 다 오싹해진다. 나는 속으로 ‘이 친구, 제 정신인가?’ 생각도 해 보았다. 내 의심의 눈초리를 읽었는지 친구는 이내 분명히 자기 친구의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말할 필요는 없고, 그냥 단지…’하며 난 친구가 끊어진 이야기를 계속 이어주기를 간청했다. 친구는 말의 보따리를 한없이 풀어놓고 나는 그 이야기보따리 속으로 끝없이 빠져들었다. 그러다보니 산행의 종착지점에 도착했다.
친구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고 목소리는 가지런했으며 검은 눈빛이 살아서 희망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친구는 우울의 바다에서 빠져나와 해변 백사장에서 무한한 태양으로 젖은 마음을 말리는 상쾌한 기분으로 떠났다. 동행하며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상한 영혼을 위로해줄 수 있는가 보다.
▲1992년 시문학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평택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