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100세가 넘으신 외할머니께서 살아 계시다. 얼마 전에 친정부모님과 함께 할머니를 뵈러 다녀왔다. 증손주까지 합하면 4대를 살아낸 인생이니 작은 몸은 세월을 견딘 흔적으로 고랑이 파이고 휘어져버렸다. 이젠 당신이 아끼던 외아들도 못 알아 본다기에 생전 마지막 뵙는 것이려니 하는 맘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날씨가 좋아서인가 반색을 하며 우리를 알아보고 기뻐하셨다. 외려 “그럼 딸도 몰라봐?” 하시고, 아버지의 거친 손에 입맞추시며 “고마워, 고맙다” 하신다. 할머니의 자존심과 고결한 품성이 여전하신데 나는 감사하고 반가워 속 눈물을 흘렸다.
어린 시절 철들기 전까지 할머니 품속에서 자랐다. 내 신앙생활의 요람이 되시고 이담에 닮고 싶은 할머니의 역할모델이신 외할머니와의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동화처럼 시처럼 마음에서 살아 움직인다. “할머니! 어디 가는데…” 별하나 없이 깜깜한 밤길을 나서는 중이었다. 툇마루에 켜진 작은 전구 빛이 흐려지는 뒤를 돌아보며 할머니 손에 이끌려 나오며 몇 번이나 물어보았지만 어디 간다는 말씀은 없었다. 할머니 손에 들려진 손전등에서 뿜어진 작은 불빛만이 우릴 인도할 뿐, 세상에 그리도 어두웠을까? 얼마나 깜깜하던지 칠흙같다는 어둠에 대한 표현을 책에서 배울 때 그 느낌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지금까지도 그 깜깜함을 잊지 못한다. 아카시아 꽃 향기가 바람에 언뜻언뜻 불어오고 논둑에서는 개구리 울음소리, 가끔씩 허공에서 메아리 치는 짐승 울음 같은 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가슴 졸이며 가는 길은 천리 길을 가는 듯 아득하기만 했다. 온 세상을 어둠이 삼켜버린 그 길에 꼭 잡은 할머니의 체온과 내 이름을 부르며 뭐라 속삭이시는 몇 마디만이 위안이 되던 시골 밤길. 그리고 그 길목 끝에 왁자한 사람들의 반가운 인기척과 대문에 걸린 둥근 등, 그 집 마당에 가득 찬 불빛들의 눈부심을 잊지 못한다. 그 곳은 상가 집이었다. 나중에 철들어 생각해보니 상가 집이었다. 그 당시엔 죽음조차 모르니 잔칫집인줄로만 알았었다. 전을 지지는 기름냄새와 모락모락 뜨거운 김이 나는 떡시루, 사람들의 분주함과 천막 안에서 화투를 즐기는 어르신들. 울타리 대문에 달려진 둥근 등이 상가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그 저녁의 풍경은 빛과 어둠의 극단적인 대립의 이미지로 내게 짙은 인상을 주었다. 또 그 상가 집의 풍경이 얼마나 밝았던지 죽음이 어떤 공포의 대상이기 보다는 현존의 살아있음에서 다른 세상으로 가는 그 마지막 찬란한 공간을 지나는 통과의례적인 의미로 각인되었다.
오랜 질곡의 역사 속에서 여인으로서의 삶은 시련과 고단함의 연속이었겠지만 내게 할머니는 굳건한 기도와 신앙생활로 감사와 희망을 놓지 않으신 자애로운 분이시다. 어느 순간 내게 이미 유산으로 상속된 신앙의 뿌리는 캄캄한 어둠의 길목일지라도 날 이끌어주는 지팡이가 되었다. 또 그날의 잔칫집 같은 상가 집의 환한 모습은 새벽여명과 함께 동트는 아침 그 큰 빛으로 들어가는 날개 달린 영혼의 큰 사위로 남아있다.
할머니의 기억이 사라지고 물기 젖은 뽀얀 눈이 다시 저 먼 곳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나왔다. 언젠가는 돌아갈 그 곳에 크고 환한 둥근 빛이 할머니의 날개를 눈부시게 하고 어디선가 아름다운 노랫소리 들리는 환영이 자꾸만 내 눈 안에서 아른거렸다.
작가소개: 손유미 시인
▲ 문학세계 시부문 등단 ▲ 경기 수필가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