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 삼십육계 중 제27계에 보면 가치부전(假痴不癲)이란 말이 나온다. 어리석은 체 하는 것을 말한다. 겉으로는 멍청하고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지만 속마음은 매우 냉정하다는 것이다. 바보같이 행동을 하면서 상대가 방심하도록 유도하는 책략이 바로 가치부전이다. 노자는 “지도자는 지략을 깊숙히 감추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바보같이 보인다. 이것이 지도자의 이상적인 모습이다”라고 말했다. 맹수는 섣불리 발톱을 드러내지 않듯이 속마음을 감추고 다가서는 적이 오히려 두려운 존재다. ‘가치부전’은 누구나 아는 방법이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어려운 병법 중의 하나이다.
어느 날 왕과 대신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때 횃불이 오르고 적이 기습해 왔다는 보고가 들어 왔다. 왕은 당황해 중신들을 소집하려 했다. 그러나 대신은 “염려하실것 없습니다. 그 횃불은 이웃나라 왕이 사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대는 바둑을 두면서도 어떻게 적국의 사정을 꿰뚫어 보고 있느냐”고 묻자 “저는 이웃나라에도 정보망을 가지고 있어서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 그러나 그 후 왕은 그 대신을 경계해 조정에서 내치고 말았다. 대신은 ‘가치부전’의 병법을 알지 못했기에 스스로 재앙을 자초하고 말았던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 중 가장 힘든 것이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바보인 척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생존을 위한 고도의 위장전술 일 수도 있고, 상대방을 안심시켜 좀더 강한 공격의 효과를 기대하는 전술 일 수도 있을 것이다.
대개 하수들은 덤벙대기 일쑤이고 사소한 칭찬에도 호들갑을 떤다. 그러나 고수들은 ‘가치부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어리석은 것처럼 위장하되 미치지 않는다. 자신의 패를 미리 보여주지 않는 치밀함을 보인다. 그러나 하수의 특징은 저돌적이다. 그저 힘으로 밀어 부친다. 되든 안 되든 당장 눈앞가림에 몰두한다. 이기려고만 든다.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는 전략이다. 하수는 소탐대실(小貪大失) 하지만 고수는 사소취대(捨小取大)를 노린다.
태종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전국을 누비며 풍류를 즐겼던 양녕대군의 일화는 흥미진지하다. 절간에서 사슴고기를 안주로 하여 술판을 벌이는가 하면, 기이한 엽각 행동을 벌이며 철저히 바보처럼 살았다고 한다.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 이현이란 사람도 평생 바보 흉내를 내면서 살았다. 그 당시에는 왕족 중에 왕을 능가하는 사람은 반역과 역모의 주동자로 몰려 제 명대로 살기에 어려웠기에 주당으로 살거나 한량으로 사는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던 것이다. 모두가 제 잘났다고 떠들며 깝죽거린 사람들은 한결같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지만 ‘가치부전’의 처세술로 살아온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 할 수가 있었다. /박남숙 용인시의원(민·자치행정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