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은 단편 ‘메밀꽃 필 무렵’에서 봉평의 메밀밭을 이렇게 묘사했다.
예로부터 메밀은 ‘오방지영물(五方之靈物)’이라고 했다. 동서남북 사방에 가운데를 더한 것이 오방(五方)이니 세상에서 가장 신령한 작물이라는 뜻이다. 메밀의 잎은 파랗고 꽃은 희며 줄기는 붉고 열매는 까만데 뿌리는 황색이니 곧 ‘오방색(五方色)’을 두루 갖췄다.
이처럼 메밀은 자연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색깔이 모두 합쳐져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식물이다. 오행설이 의학과 합쳐지면 약식동원(藥食同源)의 개념이 되는데 중국 의학서인 ‘황제내경(黃帝內經)’에서는 다섯 가지의 색(五色)과 다섯 가지의 맛(五味)이 조화를 이루면 건강에 이롭고 장수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메밀을 주원료로 해서 만든 것이 ‘막국수’다. 예전 강원도에서는 양식이 부족하면 집에서 메밀을 빻아 가루로 만든 후 국수를 뽑아 끼니를 때웠다. 메밀을 맷돌이나 디딜방아로 빻았으니 국수 역시 거칠었다. 그래서 막국수라고 불렀다. 메밀로 된 면은 만들기가 까다롭다. 끈기가 부족한 데다 열을 가하면 쉽게 끊어져 밀가루와 달리 메밀은 다른 녹말을 섞어 틀에 넣고 눌러서 국수를 만든다. 막국수의 원조격인 메밀국수에 대한 기록은 14세기 초 중국 원나라 때 왕정이 지은 ‘농서(農書)’에 처음 나온다.
메밀껍질을 벗겨 맷돌로 갈아 국수를 만드는데 ‘하루면(河漏麵)’이라고 했다. 국수틀에 구멍을 뚫어 반죽을 아래로 눌러 만드는 방식으로 우리나라 메밀면발을 뽑는 것과 같다.
이러한 압출식 메밀국수틀은 중국 동북부에서 17~18세기 초 한반도로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1835년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서유구가 쓴 농업서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 보면 압출식 국수틀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메밀의 주산지인 강원도에 막국수가 있다면 평안도에 평양냉면, 함경도에 함흥냉면이 있다. 지금은 갖은 양념을 해서 입맛에 맞게 고급화했지만 원래 막국수는 동치미 국물에 말아먹던 음식이었다. 막국수의 본향이라고 할 강원도 어딜 가도 자칭 ‘원조(元祖)’를 내세운 막국수 맛집들이 꽤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국수가 당긴다는 사람들이 많다. 요즘처럼 지루한 장맛비가 계속될 때면 더욱 그렇다. 지구상에는 1만4천 가지의 국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여름철엔 그래도 냉면과 더불어 시원한 막국수가 제격이다./이해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