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형제를 낳아 기르신 어머니는 산후조리가 좋지 않으셨는지 자주 편찮으셨고 방학 때가 되면 자식들을 위로부터 두 명씩 외가로 보내셨다.
그래서 큰아들인 나와 둘째는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안성의 외가엘 갔다. 광주에서 용인, 송전을 거쳐 한나절을 간 버스는 언제나 오후 세시 경 우리를 양성에 내려놓고 안성읍으로 가 버렸다. 외갓집까지는 정거장을 나와 산길로 접어들어 성은고개와 몇 개의 작은 산을 넘어 두어 시간을 걸어가야 했다.
외갓집이 보이는 산 마루턱에 오르면 저녁 짓는 연기가 하얗게 오르는 모양이 멀리 보이고 제대로 찾아왔다는 안도감에 마음이 놓였다. 외가동네는 원곡면 지문리 윗불지(佛地)라는 첩첩산골 해주최씨 집성촌으로 동네사람은 거의 전부 아저씨, 조카하는 일가들이고 집집마다 무슨 댁이라고 부르는 택호가 있는데 외갓집은 성북골 댁이라고 불리는 집이었다.
외 할머니는 첫 손자인 나를 끔찍이 생각하셨다. 삼대독자이신 외삼촌은 연세가 젊었기 때문에 외갓집에서는 언제나 내가 제일이었다. 할머니는 수박, 참외, 오이 등 채소와 과일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셨다. 집에 도착해서 큰절을 하고 나면 제일 먼저 우리손자 먼길에 고생했다고 왕골을 엮어 만든 부채로 부쳐 주셨다. 우리 집 부채와는 사뭇 달랐지만 가볍고 크면서 바람도 시원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주시지만 특히 찐 감자와 오이노각 그리고 콩버무리를 잘해 주셨다. 갓 쪄 낸 감자는 뜨거울 때 열무김치와 같이 먹으면 밥보다 더 맛이 있었다. 그리고 보리 타작한 짚 북데기를 태우며 그 안에 넣어 둔 감자는 껍데기가 노릇노릇 하게 된 채로 집 안팎에 구수한 냄새를 흘러 넘치게 하였다.
방학 때에만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도 있었다. 어떤 친구는 형 뻘 된다고 하고 어떤 형은 아저씨가 된다고 했다.
아침 먹고 나면 동산마루에 있는 모정으로 올라가서 방학숙제 두어 줄하고 나머지는 팽개친 채 친구들과 수영하고 와서 수박 먹고 나면 저녁이 되었고 저녁 먹고 나서 모기불 피워 놓은 멍석에 앉아 옥수수와 고구마를 먹으며 놀다가 낮부터 모기 들어오지 못하게 꼭꼭 닫아 놓은 한증막같은 방에 들어가서 집에 있는 모기장생각하다 잠이 들곤 하다보면 여름이 지나갔다.
그 중에서 두 살이 더 많은 외 당숙 아저씨와는 금방 친해져서 매일같이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놀았다. 6학년 때인가 외삼촌이 앞산너머에 산을 일궈만든 넓은 따비 밭에 수박과 참외를 잔뜩 심어 놓으셨다. 외 당숙과 나는 무슨 개선장군이나 되는 것처럼 지천으로 익어가고 있는 과일을 따서 깨뜨려 본 다음 익은 것은 먹고 덜 익은 것은 산밑으로 내 던졌다. 외 할머니가 오시는 줄도 모르고 그 짓을 하다가 호되게 혼이 났다. "이 놈들아 저희들 주려고 심어 놨는데 덜 익었다고 따서 버리면 뭘 먹으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 고 무릎 꿇고 싹싹 빌고서 야 용서를 받았다.
외갓집에 다니는 일은 중학교에 다니면서도 계속되었다. 이제는 동생들도 커서 세 명씩 갔다. 대신 나는 좀 의젓해졌고. . . 고등학교 입시생인 외 당숙으로부터 공부하는 방법도 배울 수있었다.
외 당숙은 삼 형제의 막내였다. 1학년 여름에 갔더니 마침 큰 외 당숙이 집에 계셨다. 대학교 법학과 4학년인데 고등고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였다. 큰 외 당숙은 안경을 쓰고 말투도 아버지 같이 엄하고 점잖았다. "너도 이제 중학생이 되었으니 공부를 해야지! 내가 선물을 하나 주마." 하며 그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안현필 선생의 영어실력기초라는 책을 주셨다.
"이 책을 다 외우면 영어는 잘 할 수있다." 둘째 외 당숙은 "이 책은 본문과 해설부분이 둘로 나누어 져 있기 때문에 책을 반으로 나누어야 들고 다니며 외우기 좋다."며 책을 나누어 보기 좋게 장정을 해 주셨다. 나는 외 당숙들의 배려가 너무 고마워서 방학 내내 그 공부방에서 넷이 앉아 공부를 했다. 둘째 외 당숙은 안현필씨의 본 오력일체를, 막내는 기초 오력일체를 배우고 있어 공부방에서는 안현필씨 책이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꼬맹이 동생들은 친구들과 멱감으러 도망가고 . . . .그 때에 배웠던 영어구절은 지금도 가끔 문법얘기를 할 때에 인용하기도 하고 내 영어실력의 기초 노릇도하고 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방학생활의 낭만도 없어졌고 나의 외갓집 전성시대도 막을 내렸다. 지금도 이따금 외갓집을 들러 할머니 산소에 가면 “잘있니? 내 손자!”하시는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 이래저래 어른들에게도 방학은 꼭 있어야 되는데.
/김환희 새마을운동 광주시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