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박한 충청도 사투리를 담아낸 ‘관촌수필(冠村隨筆)’의 작가 이문구(李文求,1941~2003)는 1970년대 말 3년 남짓 발안(發安)에서 살았다. 충남 보령이 고향인 그는 문단에서 유명한 마당발로 통했다. 이문구는 서라벌예대 스승이기도 한 김동리를 모시고 자의반타의반으로 ‘문단정치’에 깊숙이 관여했으나 그 무렵 서서히 서울생활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후배인 박광서가 발안이라는 곳을 소개했다. 박광서는 그 무렵 직장 때문에 발안에 살고 있었다. 발안은 화성시(당시 화성군) 향남면에 속한 곳이다. 박광서를 따라 발안을 둘러본 이문구는 그곳에 터를 잡기로 결심하고 이사를 한다. 1977년 5월이었다. 이문구가 이사한 행정리는 주민 대부분이 3대 이상 살고 있는 토박이 마을이었다. 그렇다보니 이방인의 출현에 경계의 눈길을 보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딱히 하는 일 없이 서울 나들이가 잦은 것은 물론 낯선 사람들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 모두가 수상해 보였다. 그러나 이문구는 예의 특유의 친화력으로 이내 마을의 이웃이 된다. 그렇게 몇 달을 지내는 동안 정도 들었다. 고향과도 같은 정을 느낀 이문구는 그곳에 살면서 체험한 일들을 소설로 옮겨보기로 했다. 출세작인 ‘관촌수필’에 이은 연작소설 ‘우리 동네’는 그렇게 탄생했다.
‘눈물의 시인’ 박용래(朴龍來, 1925~1980)는 이문구를 끔찍이 아꼈다. 열여섯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전에서 새벽기차를 타고 곧잘 상경을 했다. 단지 이문구가 보고 싶다는 게 기차를 탄 이유였다. 이문구도 박용래를 각별하게 모셨다. 스스로를 ‘박용래의 경호원’이라고 자처할 정도였다.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신세를 지다 퇴원한 어느 날, 박용래는 이문구에게 편지를 쓴다. ‘문득문득 형의 모습 그리워 바람 부는 날, 이렇게 펜을 들었습니다. 의무는 아니지만 언젠가는 꼭 가야할 형의 고장, 행정 마실을 오늘은 참기로 합니다. 다그치는 한파에 부디 건승하소서. -1980년 만추 청시사 용래-’ 10월 31일자 서대전우체국 소인이 찍힌 그의 마지막 엽서였다. 엽서는 이문구가 행정리에서 서울로 이사를 떠나고(11월 2일) 난 뒤 도착한다.
‘이문구의 문인기행’이 16일 다시 출간됐다. 박용래를 포함한 한국 문인 21명에 대한 해학적 인물기행이자 문단이면사다. 작가 김훈은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듣고는 “참으로 귀한 책”이라고 했다.
/이해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