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강을 오른다. 뜨겁게 몰아친 지난 계절을 숨 고르기라도 하듯 고요해진 숲길을 걷는다. 며칠 전 내린 비로 불어난 계곡 물소리에 이런저런 생각들은 던져 넣는다. 가을 소금강을 오르고 싶어 했던 너를 옆에 세우고 이러저런 이야기를 한다. 물론 너와 함께 동행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내 옆자리를 비워 너와 함께 산을 오른다.
흙 한줌 없는 바위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나를 세운다. 오랜 시간 서서히 뿌리를 내렸을, 그리고 바위를 움켜쥐기 위해 인내했을, 시간들 속에서 너를 떠올린다.
산업 디자이너의 꿈을 키우기 위해 평택에서 서울 왕복 네 시간 거리를 매일 오르내리며 자정이 넘어서야 지친 모습으로 들어서는 너를 보면서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졸다가 미처 열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다음 역까지 가서 돌아오는 막차를 놓치고 발을 동동 구르던 일들이며 혹시 또 그런 일이 생길까봐 쏟아지는 잠을 간신히 참아내곤 한다던…
4절의 도화지에 꿈을 그려 넣고 명암을 조절하고 채색을 하면서 꿈의 각도를 잡아가곤 하던 너를 저 소나무에서 본다.
척박할수록 강인한 생명력으로 뿌리를 내리는 수목처럼, 내 달리다 길이 막히면 또 다른 물길을 내어 흐르는 계곡의 물처럼 어려운 상황일수록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와 인내심이 있다면 세상은 가히 도전해 볼만한 가치가 있음이 아닐까. 잠을 자면 꿈을 꿀 수 있지만 그림을 그리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누군가의 말이 새삼 아름답다. 이렇듯 넓은 세상의 도화지 위에 꿈을 그려 넣고 나만의 색으로 칠을 하고, 덧칠해 한 편의 영화 같은 세상을 제작해 보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세상을 사는 일도 산을 오르는 일 같아서 평지를 조금 오르면 어김없이 비탈이 있고 등줄기에 땀이 쭉 흐르도록 오르다보면 작은 쉼터가 있고 때론 약수터가 나타나기도 하지. 쉼터에 걸터앉아 한 숨을 돌리다 보면 바람 한 줄기 불어와 땀을 식혀주고 우리는 또다시 정상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지. 능선 하나를 넘을 때마다 느끼는 희열과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는 몸이 야속하기도 하지만 정상이라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음이다.
정상에 올라서면 난 생각한다. 이대로 산 사람이 되어도 좋겠다고, 바위가 되어도 좋고 물이 되어 흘러도 좋겠고 나무가 되어 사철 푸르게 서 있고 싶은 욕심에 빠지기도 한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넓디넓은 산자락과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내려선 듯한 신선함이 자꾸 산을 동경하고 찾게 하는 원천인지도 모른다. 물론 정상만이 아름답고 정상만이 도전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왕 나선 길 등산화 끈 단단히 조여 매고 등이 흠뻑 젖도록 땀 한번 흘리고 나면 세상이 한결 더 만만해 보이는 것 같더라.
딸아, 너와 내가 바라보는 꿈의 각도는 다르고 우리가 도전해야 할 세상의 문턱은 높지만, 서로에게 동행이 돼 주고 서로에게 위로가 돼 준다면 힘이 되지 않을까. 너를 옆에 두고 오르는 산이 한결 가뿐하다. 너와 주고받는 대화들이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다. 스치는 바람이 고맙고 아직은 뜨거운 햇살이 좋다. 아마도 사랑의 힘일 게다. 우리 힘차게 야호하고 외쳐보자.
/한인숙 시인
▲한국문인협회 회원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2006년) ▲안견문학상 대상(시) ▲시집 <푸른 상처들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