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를 캔다, 아직은 풋풋한 줄기를 툭툭 걷어내고 호미를 들이댄다. 몇 번의 호미질을 하고 뿌리를 들어 올리자 제법 실한 녀석들이 줄줄이 따라 나온다. 고구마를 심은 것은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가뭄 때문인지 딱딱하게 굳은 땅에서 고구마를 캐는 일이 만만치가 않지만 수확을 한다는 기쁨 또한 크다.
지난 봄 고구마 한 단을 사다 심었다. 고랑을 만들어 비닐을 씌우고 묘목을 심어놓고 비료를 주는데 지나가던 어르신께서 고구마는 거름을 하면 덩굴만 성하고 고구마가 안 열린다고 하셔서 안절부절 하던 일이며 가뭄에 타들어가는 고구마에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던 일들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수확을 한다.
제법 큰 놈도 있고 손가락처럼 가느다란 것도 있다. 호미에 찍히고 억지로 잡아당겨 부러지기도 하고 땅 속 깊이 박혀 잡아당기느라 애를 먹기도 한다.
축축이 베어나는 땀을 닦아내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무심히 올려다본 하늘이 높다. 자연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태양이라는 생각이 든다.
식물들의 네비게이션은 태양이다. 식물이 웃자라야 할 때 그리고 언제 꽃을 피워야 벌과 나비가 날아들어 초례청을 차릴지를 밝혀주고 있다. 화려하지 않은 꽃일수록 향기가 강하고 병충해에도 강한 것 같다.
묵정밭에 무던히 피었다 지는 망초꽃이며 습지에 피는 도꼬마리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 묻어 종족을 번식하는 도깨비풀 등 식물의 지도를 그리고 그 안에 작은 영토를 만들어 주는 것이 태양의 역할이다.
언제쯤 열매를 익혀야 하는지, 열매가 단단하게 영글기 시작하면 제 안의 푸른 기운을 비워내는 일이며 익힌 씨앗들을 떨궈 흙 속에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다시 싹을 틔우는 자연의 일정을 조정하는 것까지 태양의 몫이다.
태양이 삐걱거리면 절기가 우왕좌왕한다. 가을에도 오월장미가 피고 개나리가 피는 것을 간혹 보기도 한다. 수확을 끝낸 가지에 다시 꽃을 꺼내놓기도 한다. 잠시 태양이 한눈을 팔았거나, 이정표를 잘못 읽었거나 커브를 잘못 그었을 때 생기는 에러 일게다. 잠시 구름에 가려졌을 때 일으키는 혼돈일수도 있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잡혀 자연 속으로 몰입한다. 실하게 영근 고구마만큼이나 생각들도 붉게 익는다. 한 고랑에서 얻는 고구마가 두어 상자는 족히 된다. 고구마를 캤다기보다는 가을을 캐고 자연의 길을 따라가 보는 것이다.
태양이 식어가는 속도로 과목과 식물들이 서둘러 열매를 익혀 제 영역을 마련하는 것처럼 세월이 가는 만큼 따라가야 할 마음을 배우는 것이다. 한 줌의 흙에서 정직함을 배운다. 손길이 닿는 만큼 정성을 주는 만큼 수확이 다르다. 묵정밭엔 묵정의 세월이 있을 뿐이다.
식물들의 네비게이션이 태양이라 여기는 것처럼 마음을 경작하고 잘 다스리는 것은 장기판 같은 세상에서 지켜야 할 것과 내 줘도 될 것을 읽어내는 일이다. 고구마 밭에서 삶의 이치를 한 수 배운다.
/시인 한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