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이 하원의원 선거에 처음 출마했을 때 옛날 게릴라 부대 동료 대원들이 선거운동용 자동차를 구입하는데 보태라면서 성금을 보냈는데 “결코 나를 돕는 길이 아니다”면서 그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걸어 다니면서 유세를 했다고 한다.
보통 시민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후 천신만고 끝에 대통령에 당선되고 취임식을 하게 되는데, 이날 관용차인 크라이슬러 리무진을 이용하지 않고 중고차를 빌려 타고 손수 운전하며 입장 할 정도로 검소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서민출신이고 또한 과거의 경력이 출중하지 못한 까닭에 정적들이 무식하다고 비판하기 일쑤였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책으로 정치를 하지 않고 인격으로 정치한다”며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거처하는 말라카냥궁을 일반인들에게 개방해 서민들이 직접 말라카냥궁을 찾아와 그들의 어려움을 호소할 수 있게 했으며, 대통령 임기 중 그의 가족 및 측근들에게 어떠한 혜택을 부여하지 않았고 도로, 다리 및 건물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는 대통령 신분이면서도 반대파 인사들의 집을 찾아 다니며 대화로 설득했고, 가난한 농민들을 위해 농지개혁법을 입안했으며, 공직사회의 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공직자 재산 공개제도를 시행하기도 했다.
만약에 그가 1957년 세부섬에서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필리핀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당시 필리핀은 일본에 이어 아시아 2위의 경제선진국이었고, 우리나라에도 경제 원조를 많이 해 준 나라였는데 지도자를 잃음으로써 필리핀은 급격한 혼란을 겪으며 끝없는 추락의 길로 돌아서게 된다.
필리핀은 1960년대 중반에 아시아개발은행을 유치할 때만 해도 당시 개발도상국 중에서 가장 앞선 나라였으며, 마닐라는 사회간접자본 등 제반 여건이 아시아 지역에서는 일본의 주요도시 다음으로 잘 구비돼 있었다. 그래서 아시아개발은행 유치도 가능했던 것이다. 실제 1960년대 초반의 필리핀은 당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우리에겐 마치 선진국처럼 부러워 할 정도의 나라였다.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견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소위 ‘개발연대’의 첫해로 볼 수 있는 1962년에 우리의 국민 1인당 소득은 87달러였다. 그때 필리핀은 이미 우리보다 거의 3배인 220달러의 수준에 있었다.
그런데 47년이 지난 오늘날의 두 나라 국민생활수준은 어떠한가? 작년에 우리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500달러 선을 넘어선 반면 필리핀은 3천500달러 수준에 머물렀다. 현재 필리핀 사회의 소득분배는 극단적 양극화로 중산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있다. 그리고 국내 투자가 저조하고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아 현재 필리핀의 많은 젊은 근로자는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일자리를 찾아 외국으로 나가고 있다. 지도자의 중요성이야 두말하면 잔소리다. 위대한 지도자가 없는 나라는 퇴락의 늪에서 허덕이게 된다. 우리는 막사이사이처럼 꾸밈없이 서민들에게 다가서는 지도자를 원한다. 부족한 것은 이해를 구하고 잘못한 것은 시인하면서 정직한 면모를 보여주는 지도자를 목말라 하는 것이다. 필리핀의 추락은 지도자를 잃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박남숙 용인시의원(민·자치행정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