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점 북서풍(北西風)에 우수수 은행잎이 떨어진다. 늦가을 싸늘한 보도(步道) 위에 노란 양탄자가 곱게 깔린다. 남은 잎새와 가지 사이로 황금색 열매가 송송 얼굴을 내민다. 은행나무는 가만가만 겨울잠 준비를 한다.
저녁 뉴스에 은행나무 가로수가 문제라 한다. 열매가 떨어져 풍기는 악취로 행인들이 불쾌해 한다는 것이다. TV 그림에, 미화원들이 거리를 물로 씻어 내고 있다. 모두들 가로수 수종(樹種)을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은행나무는 참으로 억울하고 슬픈 이야기를 듣는다. 어느 때는 봄부터 여름까지, 무성한 잎이 도시를 식혀주고 가을이면 샛노란 단풍이 곱게 물들어 도시인들의 지친 가슴을 어루만져 준다 했다. 또한 공해에 강해 도시의 혼탁한 공기에도 잘 자라고 공기를 정화시켜 준다고도 했다. 잎과 열매가 유익한 유실수로 가로수에 가장 적합하다고 찬사를 보내며 앞 다퉈 심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성년이 돼 열매를 맺기 시작하니, 잠깐의 생태적 냄새를 참지 못하고 베어 버리자 한다. 참으로 인간의 이기심은 끝을 모른다.
수십 년 전 어느 가을날 B시 근교의 맑은 햇볕에 금빛 찬란하던 그 은행나무 길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몇 년 전 이사할 집을 찾아 이곳 가평까지 왔을 때, 몇 그루 은행나무의 샛노란 잎이 누옥(漏屋)을 살짝 감추고 있는 모습에 혹해 선뜻 계약을 하게 됐다.
은행나무는 여름에 짙고 무성한 초록 잎으로 한 더위의 열기를 식혀 주며 가을 단풍은 나무들 중 으뜸이다. 한 잎, 한 잎 살포시 내려앉는 낙엽 또한 황금보료를 깐 듯 아름답다. 나는 뜰 안에 떨어지는 은행잎을 쓸지도, 태우지도 않는다.
자연의 선물 노란 은행잎, 그 황홀한 아름다움은 수많은 사진작품들과 문학작품 속 연인들의 추억 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은행나무는 약 2억5천만년 전 고생대 이첩기 화석에 나타나는 지구상 현존하는 식물 중 가장 오래됐다. 싹이 트고 20년 이상 돼야 열매가 달리며 암수 나무가 바람에 의해 맺어진다. 익은 열매의 껍질은 불쾌한 냄새를 풍기고, 불에 잘 타지 않으며, 병충해에 강해 오래 산다. 씨와 잎은 요리의 재료와 약용으로 쓰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용문사 은행나무는 1천100년이 넘으며, 고려 건국 직전 한 스님이 중국에서 씨를 가져와 사찰 앞에 심은 것이 전국으로 퍼졌다 한다. 용문사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된 것을 비롯해 전국 19그루가 지정, 보호받고 있을 만큼 인간에게는 유익한 나무이다
은행열매의 냄새는 연중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장미에도 가시가 있고 그림자 없는 빛은 없다. 아름다움을 만끽하려면 당연히 그 대가도 치러야 한다. 더구나 열매는 굳이 동의보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에게 유익한 것 아닌가.
은행나무가 사람들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은 경제적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이다.
이 가을 해맑은 햇살 아래 황금빛 은행잎이 눈부신 거리를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걸어 보라. 그래도 은행나무 가로수를 베어 버리자는 소리가 나올 것인지.
/수필가 김용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