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 재학 중 3.1운동에 가담하고 옥고를 치르다 숨진 항일 독립운동가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에 대부분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저 없이 ‘유관순열사’를 꼽을 것이다.
맞다. 그러나 당시 조선팔도에는 유관순 열사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제2, 제3... 수천 수만의 유관순 열사가 있었다. 수원의 이선경 열사도 유관순 열사 못지않게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뜨거운 피를 흘리고 생명을 바친 여성이었다.
이선경 열사는 당시 수원면 산루리(현 수원시 팔달구 교동)에서 태어났는데 1921년 경성지방법원 재판기록에 19세로 적혀 있어 유관순 열사와 같은 1902년생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에 재학 중 3.1운동에 가담했다. 1919년 3월 말부터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며 독립에 관한 인쇄물을 고향인 수원군 수원면 일대에 비밀리에 배포했다. 이로 인해 1920년 퇴학당한 후에는 항일비밀결사 구국민단을 조직해 활동하다 1920년 8월 체포돼 1921년 4월 12일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러나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같은 달 21일 수원면 매산리(현 매산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수원박물관이 밝힌 자료에 따르면 이선경 열사가 선고공판에 출석하지 못한 것으로 확인돼 심한 고문으로 후유증을 얻은 것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감옥에서 숨지면 골치가 아플 것을 우려해 일제가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화여고에 다니다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벌인 유관순(1902∼1920)열사와 비슷한 길을 걸은 셈이다. 수원시는 당시의 재판기록과 경기여고 학적부 등을 토대로 이선경 열사의 독립운동을 재조명하고 있다.
제72주년 순국선열의 날인 오늘(17일) 오후 3시부터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열리는 수원지역 인물 재조명 심포지엄에서는 이선경 열사에 대한 사망 확인과 후손 확인 등 새롭게 발굴된 자료들이 발표된다. 특히 사망한지 90년이 흐른 오늘 이선경 열사의 순국 사실을 제적부를 통해 확인하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이선경 열사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도 할 계획이란다.
아직도 친일행위를 청산하지 못해 친일파의 후손들이 득세하는 우리나라의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이선경 열사는 반드시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추앙받아야 마땅하다. 아울러 정부가 못하면 자치단체 차원에서라도 이선경 열사 등 지역 독립유공자나 그 후손에 대한 예우의 격을 한층 더 높여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