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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를 끝낸 들판이 평온하다. 하얀 무게를 둘러쓴 거대한 알처럼 보이는 짚더미며 나락을 베어낸 자리 어느새 푸릇하게 올라와 오종종 떨고 있는 새순들이 늦가을의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때를 잊고 꽃망울을 터트렸던 망초꽃도 엊그제 내린 된서리에 풀썩 주저앉았고 막바지 김장용 야채를 수확하는 손길로 분주하다.

가을 들판에 서면 어머니를 생각하게 된다. 새싹을 틔우고 무더운 여름 태풍과 장마를 견뎌 꽃을 피우고 태양의 길과 달의 날짜를 기억하며 열매를 익혀 수확을 끝내고서야 바람의 통로가 돼 주는 들판은 모성이다.

어린 나이 출가해 층층시하 어른들 봉양하고 자식들 다 키워 출가시키기까지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견뎌냈을 어머니. 몽당연필처럼 닳고 닳은 손마디와 주름사이에 묻어나는 세월을 볼 때마다 어머니나 빈들이나 같다는 생각을 한다.

유년의 기억들이란 참으로 매콤하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살얼음이 살짝 든 논에서 미꾸라지를 잡아와 적당히 익은 김장김치 송송 썰어 넣고 끓여주시던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양의 미꾸라지에 소금을 한주먹 뿌리면 세차게 몸부림치다 이내 잠잠해지던 미꾸라지를 쇠죽을 끓여낸 아궁이 잔불에 자글자글 끓여 아궁이 앞에서 퍼 먹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온 몸에 짜릿한 기운이 도는 듯하다.

고만고만한 자식들을 불러 앉히고 숟가락을 서로 들이밀며 퍼먹던 맛은 일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양념을 많이 한 것도 아니고 별난 재료를 넣어 끓인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얼큰하고 개운한 것이 정말 맛났다. 특히 아버지의 약주가 과하신 다음날은 어김없이 삽을 들고 나가셨다.

정월대보름쯤이면 며칠씩 쥐불놀이를 했다. 마루 밑에 모아뒀던 깡통에 구멍을 내고 철사로 줄을 만들어 어머니가 깡통에 담아주시는 불씨를 들판으로 가져가 쥐불놀이를 했다. 논두렁에 콩을 베고 난 뿌리를 뽑아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낮에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다 숨겨놓기도 했다. 누구의 불씨가 멀리 그리고 높이 올라가나 하는 시합에 열을 올리곤 했다.

밤이 이슥하도록 쥐불놀이를 하고 이집 저집 몰려다니며 놀았다. 한번은 쥐불놀이 하다가 이웃집 집동구리에 불이 붙어 집 한 동을 모두 태우고 쫓겨난 일이며 물웅덩이에 빠져 젖은 양말과 신발을 말린다며 양말을 태워서 야단맞은 일 등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름다운 추억이다.

빈들에 서면 어머니를 보는 것 같다. 자식을 키우는 일이나 수확을 끝낸 빈터에 풀벌레들을 품고 있다. 봄이 되면 다시 들판으로 내보는 일이나 비운다는 것은 또 다른 채움이다.

혹한에 바람의 통로가 돼 주고 폭설을 받아내며 봄을 준비하는 들판처럼 어머니의 자리 또한 늘 내주기만 하다 빈들이 돼 봄을 기다리는 그런 마음일 것이다.

구름이 낮게 내려왔다. 첫눈이라도 흠뻑 내려서 온 들이 하얗게 됐으면 좋겠다. 휴대폰을 열어 어머니에게 안부전화를 하며 들판을 빠져나온다.

/시인 한인숙

▲한국문인협회 회원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2006년) ▲안견문학상 대상(시) ▲시집 <푸른 상처들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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