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무대가 준비되지 않아도, 본인이 원하는 단 한사람의 관객만 있어도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공연이 있다. 어머니의 옴니버스식 공연은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는 관객들이 추임새를 충분히 넣어줄 때 더 신명나게 진행되고 은근한 중독성을 지닌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날도 어머니 혼자 하는 조용한 독백으로 공연은 시작됐다.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는 오전 한나절은 참 지루할 때가 있거든. 어떤 녀석 하나 전화라도 할꺼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바지 단 뜯어진 게 생각나는 기라. 그래서 실과 바늘을 찾는데, 통 찾을 수가 있어야지. 문득 전에 상두가 자취할 때 쓰던 책상 서랍 생각이 난거야. 그 녀석도 살림을 살았으니 혹시나 해서 뒤져봤는데 다행히 거기 실, 바늘이 있어 꺼내들고 바지 단을 꿰맸거든.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 거야. ‘이 바늘로 그 녀석이 뭘 꿰맸을까?’ 씰꾸리에 까만 실이 제법 옹골차게 감겨 있는 걸 보니 지가 감아둔 건지, 내가 감아주기라도 한 건지. 지 형은 누나 틈에 끼어 학교 댕길 때 밥이라도 편히 얻어먹고 다녔는데, 갸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내 녀석이 지손으로 밥해먹고 혼자 살았으니 아픈 손 맹크로 자꾸 가슴이 끼는게 저래 장가가고 아들, 딸도 낳고 잘 살아도 그 생각만 하면 짠해 지는게......”
대사를 잠시 멈추고 눈시울을 붉힌다. 어머니의 무대는 늘 그랬다. 주제는 언제나 6남매 이야기. 6남매가 모두 모이는 날이면 여지없이 막을 올린다. 6남매에 관한 이야기의 메인 메뉴는 늘 정해져 있다. 큰 아들 돌 지나 누나들이 먹인 찔레나무열매 때문에 병원에 실려 간 일, 둘째 아들 젖만 먹으면 경기하며 기절해 병원에 실려 간 일 등 사건들이 반복되는 구수한 토크쇼. 매번 같은 주제의 토크쇼지만 그날마다 기분에 따라 분위기는 사뭇 달라지니, 관객들은 진지하게 들어주고 함께 웃고 또 함께 애잔해 한다. 옴니버스 연극으로 시작해 토크쇼로 진행되고 다시 연극으로 반복되는 어머니의 무대는 늘 그렇게 연중 수시로 공연되고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노년의 어머니는 혼자 식사하고 혼자 텔레비전을 보고 마침내 집안 물건과도 중얼중얼 이야기 나누며 마음의 허기를 채워야 했다. 홀로, 그 옛날 왁자했던 추억 속에서 모두를 떠나보낸 후의 하루하루를 견디며, 하루는 웃고 하루는 혼자라는 생각에 쓸쓸해졌다가 마음이 담긴 물건이 눈에 띄면 또 한 번 생기가 도는 날을 살고 있는 거다.
노년의 고요한 삶. 그 고독한 삶 속에 내가 있다. 우리가 있는 것이다. 갓 20대를 넘어설 즈음 40대의 어른을 보았을 때, 그들에게는 새로운 도전이나 희망이 달리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도달했던 그 40대엔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도전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았었다. 이제 인생의 후반을 살고 있는 어머니의 삶 속에서 나를 찾고 있는 것이다. 며칠 후에 있을 어머니의 생신, 어머니의 무대가 또 기대된다. 이번 공연엔 어떤 이야기가 또 양념으로 등장할 지, 보조출연은 또 누가 담당할 지 모르겠지만 발갛게 홍조 띈 어머니의 양 볼과 6남매의 왁자한 추임새에 함께 어우러질 어머니의 그 진지한 대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 토크쇼가 벌써 그리워진다.
/수필가 이상남
▲에세이 문예 등단 ▲평택문협 회원 ▲한국에세이작가연대 회원 ▲독서토론논술 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