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보 제1호인 서울 남대문(숭례문)은 ‘한일합병’ 직전 교통상 장애 등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헐릴 뻔했으나,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가 이끄는 일본군이 조선 왕궁으로 입성한 문이라 해서 보존된 것으로 2일 밝혀졌다.
마찬가지로 보물 제1호인 동대문(흥인지문) 또한 가토와 함께 일본군 선봉을 담당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1600)가 이 문을 통해 입성해 서울을 함락시킨 자랑스런 기념물이라 해서 역시 보존된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서대문(돈화문) 등은 일본과 관련된 역사성이 없어 파괴됐다는 주장도 덧붙여졌다.
이런 사실은 지난해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조선 성곽 정책을 연구해 석사학위를 받은 오타 히데하루(太田秀春) 일본 도후쿠(東北)대 특별연구원이 서울대 국사학과 기관지 「한국사론」 49집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드러났다.
오타씨는 '근대 한일 양국의 성곽 인식과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 정책'이라는 논문에서 관련 사료들을 발굴 분석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던 1904-1905년 무렵 일제는 남대문과 동대문 등을 완전히 헐어버리거나 이전하고자 했음을 밝혀냈다.
오타씨에 따르면 남대문 파괴에 가장 적극적인 인물은 1904년 9월 이후 1908년 11월까지 조선군사령관으로 근무한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1924).
1916-1919년 제2대 조선총독으로 취임해 강압통치를 시행한 것으로 유명한 하세가와는 조선군사령관 시절 남대문을 지칭하면서 "포차(砲車) 왕래에도 지장이 있으니까 그런 낡아빠진 문은 파괴해 버리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요미우리신문 편집장 주필을 거쳐 당시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거류민단장인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1864-1924)에게 제동이 걸렸다.
오타씨에 따르면 나카이는 "(남대문은) 가토 기요마사가 빠져나간 문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건축물은 남대문 이외 두 세 개밖에 없습니다. 파괴하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까"라고 설득했으며 이를 하세가와가 받아들임으로써 보존되었다.
나카이는 남대문을 보존하는 대신 서울 성곽-남대문-남대문 정거장을 연결하는 간선도로를 남대문 좌우로 낼 것을 제안했으며 실제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타씨는 "일본측의 남대문 보존논리는 남대문이 가토와 관계가 깊었기 때문이지 문화재적 혹은 건축학적,미술사적 가치 때문에 보존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나아가 동대문(흥인지문)이 보존되고 서대문(돈화문)이 파괴된 것도 같은 이유였다고 하면서 "동대문은 가토와 함께 (일본군) 선봉을 담당한 고니시가 이 성문으로 입성해 서울을 함락시킨 역사적 유래"에 의해 보존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오타씨는 1915년에 발간된 나카이의 회고록 「조선회고록」과 당시 신문.잡지 등의 출판물을 분석함으로써 밝혀냈다.
오타씨에 따르면 이러한 보존 내력 때문인지 1927년에 발간된 조선여행 안내서인 「취미의 조선 여행」에는 "그 옛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 때 가토가 남대문에서, 고니시가 동대문에서 경성에 쳐들어 갔다고 하는데 그 남대문이 이 남대문이다"고 해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