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거름에 들로 나가 물을 준다. 말라 쩍쩍 갈라진 밭에 물을 퍼 나른다. 낮새 축 쳐져있던 밭작물들 생기를 되찾고 좀처럼 싹을 틔우지 않던 땅콩도 새순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옆 수로에서 물을 퍼 날라 작물들에 목만 축여주는 일도 만만치가 않다. 가뭄이 오래다 보니 생육이 더뎌진 채소들은 억세고 질기며 유실수의 열매도 잘 자라지 않는다. 아침에는 그나마 밤새 내린 이슬로 촉촉하지만 한낮의 태양이 지나치고 난 오후의 밭은 흙먼지가 풀풀 날린다.
농사는 물과 풀만 잘 다스리면 절반의 성공이라고 한다. 다행히도 이곳은 수로가 잘 돼 있고 아산만에서 보내주는 물의 양이 충분해 벼농사에는 별 지장이 없는 듯하다. 이렇게 가뭄이 오래가면 천수답 농사를 짓는 농가는 어려움이 더 크다. 어릴 적 우리 논도 천수답이었다. 모내기를 할 때마다 물과의 전쟁이다. 물을 대기 위해 아버지는 들판에서 밤을 보냈고 평소에는 친하던 이웃도 이때만은 신경을 곤두세우기 일쑤다. 물길을 열어놓고 아침에 가보면 물이 다른 논으로 들어가는 일이 종종 있다 보니 물길을 지키기 위해 밤을 새우는 것이다.
양수기를 들이대고 관정을 뚫지만 가뭄에는 장사가 없다. 도랑에서 쫄쫄 흘러내리는 물을 기다리다 보면 갈아엎은 논엔 풀만 무성하고 이양시기를 놓친 벼는 웃자라 농심을 태우곤 했다. 며칠 내로 비가 오지 않으면 한해 농사는 망친 거나 다름없다며 손끝이 타는 줄도 모르고 담배를 태우던 아버지의 근심이 눈에 선하다. 다른 것은 양보해도 모내기 철 물꼬 앞에선 절대 양보란 없는 것이 농부의 마음이다. 특히 하늘 바래기 농사를 짓는 곳에서는 말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물싸움에 지친 아버지는 윗배미에 둠벙을 만드셨다. 논을 두 개 합쳐 저수지를 만들었다. 지금 같으면 굴착기로 잠깐이면 하는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인부를 들여 몇날 며칠 파고 또 파내 물을 가둔 후부터는 농사가 조금 수월해졌다고 하셨다. 우리 논뿐 아니라 주변에 논들도 많은 혜택을 입었고 강수량이 많을 때 물을 가두고 동네 사람들이 붕어나 잉어 등 민물고기를 잡아다 넣은 것이 부화하고 자라서 농한기 때는 물고기를 잡아 동네 천렵을 하기도 하며 이웃 간의 정을 쌓는 모습이 어린 눈에도 참 좋아 보였다.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러웠고 우쭐해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올해의 가뭄 또한 심각하다. 뉴스를 보거나 들녘으로 나서보면 얼마나 물이 부족한지 실감하게 된다. 비 예보가 있어도 하늘만 흐리다 말고 먼지만 적셔질 만큼의 강우량이다 보니 감질만 난다. 하늘이 하는 일은 어쩔 수 없다지만 물을 잘 조절해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저수량을 잘 조절해 가뭄에 대비해야 한다. 똑같은 가뭄에도 어느 저수지는 아직 여유가 있는가 하면 어느 저수지는 바닥을 드러내놓고 있는 것을 보면 물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이다. 농사에 필요한 물은 물론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조차 구하지 못해 식수를 지원받으며 고생하는 이웃들을 보면서 한 방울의 물도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