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찜통 같이 무더운 날씨다. 밤새 뒤척이다 첫 새벽에 일어나 밭으로 간다. 참깨, 옥수수, 고구마, 콩들도 밤새 더위에 곤욕을 치렀는지 이파리들이 시들시들하다. 고추밭 두렁으로 발을 옮기자 초록빛 잎사귀 사이에 고추가 제법 빨갛게 익어 새벽 햇살에 빛나고 있다.
고온이 계속된 날씨 탓으로 고추가 붉는 속도에 가속이 붙어 그동안 가꾸어 준 주인 허락도 받을 새 없이 순식간에 익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고추밭 고랑에 서서 바라보니 뿌듯하다. 해마다 느끼는 기분이지만 첫 물 고추를 딸 땐 더 붉은 고추가 빛나 보이고 더 탐스러워 보인다. 내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나, 첫 아이가 처음 입학했을 때 소중하고 뿌듯했던 것 같이 첫물고추를 보는 뿌듯함이 마음 가득 차오른다.
고추 하나를 따서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 한 개의 색깔 고운 고추를 만나기 위해서 봄부터 밭을 고르고 거름을 주고 좋은 고추모종을 준비했다. 그리고 바쁘다는 큰 아이들을 데리고 흙을 만지게 하고. 그 흙 속에 좋은 뿌리 내림을 위해 구덩이 파게하고. 물을 주고 흙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삽질을 하기 싫어하고 흙을 만지기 싫어하는 아이를 보면서 요즘 젊은이들이 모두 흙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안일주의에 빠져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했던 일도 생각난다.
고추모종을 하고도 고추밭 일은 계속되었다. 고춧대를 세워 넘어지지 않도록 고정 시켜주는 일이며 고추나무에 샛가지 칠적마다 제거해 주는 일이며, 잘 자라라고 영양제를 공급해주고 가뭄에는 물을 뿌려주는 일이며, 때 맞추어 병충해 방제를 하며 심혈을 기울였던 일이 엊그제 일 같다.
처음 따는 고추는 유난히 길쭉길쭉하고 탐스러우며 반짝이는 빨간빛이 있다. 그래서 소쿠리를 채우는 일도 금방금방 한가득 담겨진다. 거의 다 땄을 무렵 한 자루를 채우고 두 자루가 좀 안되게 채우고 있는데 아랫마을 사시는 당숙모님이 고추밭을 지나가시다가 들여다보시며
“첫 새벽에 고추를 따 나? 올 고추농사가 잘 되었구먼.”
“네, 저희는 조금 심었지만 당숙모님네는 많이 심어서 많이 따셨죠?”
“많이는 뭘. 탄저병이 심해서 올해는 시원치 않아. 그런데 자네네 밭에는 탄저병이 없나봐.”
“없긴요. 나무마다 몇 개씩 있어서 따 버리기도 하고 나무 전체가 병든 나무도 있어서 아주 뽑아버리기도 해요.”
“올해는 장마도 길고 가뭄도 길고 기온이 정신 못 차리게 오락가락했으니. 그만하면 고추농사 잘 지은 거여”
당숙모님은 혀를 쯧쯧 차시며
“얼마 안 남았으니 어서 따고, 배고픈데 아침 먹으러 들어가게.” 하신다.
당숙모님 말씀대로 우리 고추밭에도 여기저기 탄저병이 든 고추가 매달려 있다. 그렇게 병든 고추를 따낼 적마다 속이 아프고 쓰리다. 병든 고추를 따놓고 보니 두 소쿠리를 담고도 넘치게 많았다.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나마 밭 전체가 다 병들지 않은 것 만해도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다음 번 고추를 딸 적엔 탄저병이 없는 아주 깨끗한 고추를 만나기를 고대하면서 씁쓸한 마음이 들지만 올해 처음 수확 한 고추 담은 자루를 보니 흐뭇하기만 하다. 말복이 지나니 서늘한 기운이 돈다. 마를 대로 마른 고추나무들이 숨을 돌리고 다음번 고추수확엔 더 탐스런 고추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