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를 읽다 가슴이 뜨끔한 문장을 만났다. 子遊問孝(자유문효). 子曰(자왈) “今之孝者(금지효자), 是謂能養(시위능양), 至於犬馬皆能有養(지어견마개능유양), 不敬(불경), 何以別乎(하이별호)?” 자유가 효에 대해 묻자 공자가 답했다. “요즈음의 효(孝)는 부모를 그저 봉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개나 말도 먹이고 돌볼 수 있지 않는가. 만약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와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 과연 나는 공자의 이 말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얼마 전 병중에 계시던 장모님이 돌아가셨다. 장모님은 척추 수술과 양쪽 고관절 수술 등 돌아가실 때까지 2년여 동안 가까운 도시의 요양원, 요양병원, 대학병원 등을 전전 하셨다. 아내가 무남독녀인 까닭에 뒷바라지 할 사람은 오직 아내와 나 뿐이었다. 한동안은 매일같이 병원에 다니기도 했고 요양병원에 계실 때에는 일주일에서 열흘 간격으로 문안을 드렸다. 나름대로 아내가 고마워 할 만큼 최선을 다했다. 장모님의 뒷바라지는 좋든, 싫든 마땅한 나의 도리(道理)라고 생각했다.
공자 말씀은 도리만으로 병 뒷바라지를 했다면 개나 소를 가축병원에 데리고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단순히 의무감으로 병난 부모를 병원으로 모셔 치료 받게 하는 것만으로 효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과연 나는 진심으로 장모님의 건강을 위하고 하루라도 더 사시기를 걱정하면서 병원으로 모시고 다녔을까? 그렇다고 선뜻 대답하기가 주저해 진다. 그것은 나의 효와 덕(德)이 부족했기 때문이겠지만 뭔가 또 다른 이유도 있을 것 같다.
부모사랑은 자식사랑과 다르게 본능이 아니다. 신(神)은 오직 유전자 보전(保全)에만 관심이 있어 유전자를 계승시켜 줄 자식은 사랑하라는 본능을 줬지만, 이미 할일을 끝낸 부모는 신의 관심 밖이었다. 연로한 부모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맬 때와 자식이 사경을 헤맬 때의 충격과 슬픔을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후천적 교육으로 생긴 도리와 선천적인 본능의 차이라 하겠다.
근래 평균 수명이 많이 늘어나 80, 90대의 부모와 60, 70대의 자식이 같은 시간대에 살고 있다. 옛날 같으면 자식도 이미 천수(天壽)에 이르렀다. 천수를 누린 부모가 돌아가시면 호상(好喪)이라 해 상가에 웃음소리도 들리는 것은 천수를 넘긴 죽음은 너무나 당연한 자연의 섭리임을 자식이나 조문객들이 알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는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효를 꼽았다. 효는 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됨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효를 백행지본(百行之本)이라 했다.
요즈음에는 예의와 도덕, 더불어 효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이것은 단순히 현대인의 인간성, 도덕성 때문만이 아닌 사회적인 문제가 더 큰 몫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농경사회와 복잡한 현대의 산업사회는 인간의 생존방식에 많은 차이가 난다.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 예(禮)와 도덕도 변질되고 있다. 효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오늘 효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본다.
▲월간 한국수필 등단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가평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