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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한인숙"길의 반란'

 

길이 터진다. 가로수가 길을 들어올린다. 땅으로 심겨질 나이테가 툭툭, 도로를 들어 올린다. 뿌리의 지문이 길 위로 새겨지고 군데군데 뒤틀린 갓길로 가을날의 씨앗들이 들르고 거리의 소음들이 속속 파고든다.

20여년 쯤 새 길이 뚫리고 아파트가 생기면서 가로수가 조성됐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을 견디면서 나무도 많이 성장했다. 침침한 가지 속 여린 잎을 꺼내놓으면서 봄을 알렸고 무성한 잎으로 한 여름 그늘을 준비하더니 이젠 하루가 다르게 나무의 빛깔이 변해가고 있다.

그 가로수가 반란을 시작했다. 땅으로 심겨질 뿌리들을 끌어올려 길 위로 꺼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갈라지고 자전거 바퀴살이 놀라 움찔거리고 조깅을 나선 운동화를 잡아당겨 넘어뜨리기도 한다.

태풍이 지나칠 때면 한두 그루씩 넘어지기도 했고 지나던 차량의 부주의로 넘겨지기도 하면서 거리를 지키던 가로수가 땅 밑을 거부하고 길 위로 나서면서 뿌리를 통과한 길은 힘없이 무너지고 있다.

자전거로 통학하던 남학생이 불뚝 솟아오른 길에 걸려 넘어져 부상을 입기도 했고 유모차에서 잠든 아기가 놀라 울기도 했다. 너무 얕게 심겨진 때문일까.아니면 뿌리로 향하려던 태양의 일정이 잎으로만 당겨지면서 일어난 현상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무는 반란을 시작했고 뚜껑만 씌워졌던 길이 쩔쩔매고 있다.

얼마 전 수도관이 터져서 공사를 했다. 땅 밑에서 생긴 사고라 수도관이 새는 줄도 몰랐는데, 수도 검침원의 발견으로 알게 됐고 공사를 해본 결과 사고의 원인은 은행나무였다.

가로수의 뿌리가 수도관 밑으로 파고들어 수도관을 들어 올리자 못 견딘 파이프의 연결관이 빠진 것이다.

수도관과 은행나무의 거리는 꽤 있었지만 나무가 실하다 보니 상가 입구까지 뿌리를 뻗친 것이다.

가뭄이 심하거나 청소를 하고 난 후 허드렛물을 나무에 주다보니 우리 상가 앞의 가로수가 다른 것보다 크고 무성하다. 간판을 가려서 불편하기도 하지만 길게 늘인 그늘이 좋았고 유리문 쪽으로 가지를 늘인 놈이 피아노 소리에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 사고로 공사비용도 많이 들었고 수도요금 또한 만만치 않게 나와서 속도 상하고 화도 났다. 계량기 안쪽에서 생긴 사고라 수용가 책임이라 하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감당을 해야 했다.

그렇다고 범인인 은행나무에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냥 속만 끌이다 말았다.

따지고 보면 유리문 밖으로 바라보며 계절을 느끼고 바람의 일정을 가늠하고 가끔씩 나무에게 털어내던 넋두리의 값을 제대로 치른 셈이기도 하다. 머잖아 노랗게 물들 은행나무가 또 그만큼의 즐거움을 안겨줄 것이지만 나무의 반란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길의 뚜껑을 열면 고스란히 묻어날 것 같은 푸른 비명이 불안을 키우고 있다. 땅 속으로 깊어져야 할 뿌리가 길을 들어 올리고 수도관을 파손시키는 동안 뿌리는 애면글면 가쁜 숨을 토해내고 나무는 허공 깊숙이 물길을 내고 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2006년) ▲안견문학상 대상(시)

▲시집 <푸른 상처들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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