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중순 초등학교 동창회에 다녀왔다. 졸업한 지도 어느새 40여 년이 되어가고 있다. 성질 급한 친구는 세상을 떠나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대부분의 친구는 제 몫의 세상을 살아내느라 희끗해진 머리와 질퍽해진 입담으로 모교 운동장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할머니가 되어 손녀 자랑을 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쉰에 얻은 늦둥이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세월 가는 줄 모른다는 친구. 밖으로만 돌던 남편이 아이가 생기자 집과 회사밖에 몰라 이제야 세상사는 맛이 난다며 자랑이 늘어진 그녀를 우리는 부러움 반, 걱정 반으로 엇갈린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만날 때마다 편안해지는 친구가 좋아서 힘닿는 만큼 모임에 참석하려 노력한다. 육학년 때 같은 반으로 편을 갈라 게임을 하는 친구들을 목청 높여 응원하고 박수치고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초등학생들이다.
처음 개교하는 학교라서 일이 많았다. 나무를 심고 잔디를 깔고 운동장에서 돌을 골라냈다. 장마철이면 발이 쑥쑥 빠지는 운동장에서 풀을 뽑으며 하루가 멀다고 운동장에 집합하여 봉사활동 하며 손수 가꾼 학교다. 말이 봉사활동이지 수시로 불려나가 작업을 했다.
꽃씨와 잔디 씨앗을 받으러 다니고, 뒷산에 송충이를 잡았고, 솔방울을 주워 난로를 지피고, 그 난로 위에 도시락을 층층이 쌓아 올리고 선생님이 준비해 주시는 따끈한 보리차에 추위를 녹이던 시절, 장난기 많은 친구는 삼삼오오 패로 몰려다니며 고무줄놀이를 하는 여자 친구의 고무줄을 끊어 달아나고, 치마를 번쩍 들어 올리는가 하면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벽에 낙서해 놓기도 했다.
그 중심에 있던 가장 개구지고 가장 말썽을 피우던 친구가 이젠 어엿한 중년 신사가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쑥스러운 듯 첫사랑을 고백하기도 하고, 짝사랑하던 친구를 조심스레 호명하기도 한다.
이젠 학교도 많이 좋아졌고 체육관이 생기고 예쁘게 가꾸어져 있지만 지금도 교문 앞에 서면 그 시절이 오래되지 않은 영상 같다. 그네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보면 어느새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덩치 큰 친구와 시소를 타다가 균형을 잃어 뒤로 벌렁 넘어지기도 하던 그 순간이 떠올라 그네도 밀어보고 철봉에도 매달려 본다.
육성회비를 제때 못내 쫓겨 오기를 수없이 하고, 모심거나 벼 베는 날은 동생 보느라 학교에 못가면 선생님께 꾸중 듣고, 비 오는 날 찢어진 우산 준다고 울어서 눈물과 빗물이 범벅 되어 학교 가던 일을 떠올려 보면 딱 그때의 아이다운 모습이다.
책상에 줄을 그어 못 넘어오게 하고, 시험 볼 때면 가방을 얹어 옆 친구를 경계하고, 힐끔힐끔 넘겨다보다 선생님께 답안지 빼앗기던 친구가 이젠 이 나라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몇 십 년의 세월이 저절로 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년에 한두 번이지만 친구들을 만나고 나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새로운 힘과 활력소를 얻는다. 나태해졌던 정신을 추스르게 되고 조금은 더 당당해진 나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이 가을 또 하나의 추억을 꺼내보며 잠시 행복에 빠져든다.
▲ 한국문인협회 회원 ▲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 안견문학상 시 대상 ▲ 시집- 푸른 상처들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