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국회의원의 출판기념회에 간 적이 있다. 출입구 양 옆으로 늘어선 수십 개의 화환들이 국회의원의 위력을 실감케 하는 가운데, 주인공인 국회의원 앞에는 눈도장을 찍으려는 인사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국회의원이 소속된 상임위원회 관련 공기업 간부들, 관련기업체 홍보책임자들, 지역구의 유지들이 대부분이었다.
특이한 것은 지역구 기초의원 전원이 출석해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정도로 이리저리 뛰며 마치 자기 일처럼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이었다. 총선기간 내내 선거사무실을 지키며 각종 궂은일을 도맡는 건 기초의원 부인이라는 사실은 이제 새삼스러울 게 없다.
4년간 임기와 생활급이 보장되고, 지역리더로서 각종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기초의원직을 생각하면 평소 지역구 국회의원의 행사장 나들이는 일도 아니다. 어느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굴욕적 순간을 맞이하지만 대부분은 기초의원 배지가 주는 달콤함에 참아 넘긴다. 시장, 군수, 구청장으로 불리는 기초단체장도 ‘오십보, 백보’다.
이렇듯 기초의원들이 충성스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국회의원이나 정당의 지역구 책임자가 손에 쥔 공천권 때문이다. 공천권자의 심기에 따라 주민들의 박수를 받는 기초의원도 공천에서 탈락하고, 공천권자와 가깝다는 지역 무명인사가 갑자기 기초의원 배지를 달고 거리를 횡행하기도 한다. 또 돈을 받고 공천권 장사를 하다가 법망에 걸린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 참신한 지역신인들이 입문할 통로를 틀어막아 지역정치의 선순환구조를 망가트린 점은 공천권을 정당에 귀속시킨 정당공천제의 패악질이다.
공천권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공천권이 지역풀뿌리 정치를 병들게 하고 있다. 국회의원에서 기초의원으로 이어지는 종속적 공천제도는 지방정치가 중앙정치에 예속되는 폐단으로 드러났다. 주민 대다수가 정당공천제를 폐지하자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정치권이 외면해 왔다. 공천권이라는 단맛에 취한 정당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통령선거가 1개월 앞으로 다가오자 여야 유력후보들 모두가 ‘기초의원과 기초단체장의 정당공천제 폐지’를 공약하고 있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드디어 고양이가 스스로 자신의 목에 방울을 달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당공천제라는 제도의 폐지만으로 풀뿌리 민주주의를 복원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정당공천제가 폐지되더라도 정당의 영향력은 내천 등의 방법으로 존속될 가능성이 높다.
정당공천제 폐지와 동시에 기존 정당당의 개입을 원천봉쇄하는 입법이 필요한 이유다.
/김진호 편집이사·인천편집경영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