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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두의시선]흔들려도 당신은 꽃

나는 언제까지고 아내를 기다릴 셈입니다 잠시부는 바람이기에…

 

남자 나이 마흔여덟은 한창 때이다. 젊은 시절에 부지런히 일한 결실을 거두는 시기가 쉰 살쯤일 텐데, 이를 앞두고 있는 사내들은 어느 정도의 명예와 경제적 안정을 거두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못했다. 그늘진 그의 얼굴에서 알 수 없는 눈물들이 그려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서 내 하루는 언제부터인지 그에게 관심을 끌게 했었다.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하루아침에 거리에 나앉게 된 그는 공공근로사업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경비원에 배치된 그는 날마다 밤을 꼬박 지새우며 순찰을 돌았다. 젊은 사람들에게도 고된 일이었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쉰 줄에 접어든 그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일하는 모습은 낯설면서도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젊은이들보다 일처리에 서툴기는 하지만, 회사에서 잘나가던 때와 지금의 처지는 남루하기 이를 데 없지만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있다는 점에서 존경심마저 불러일으켰다.

말이 별로 없는 그는 웃음도 말수만큼이나 아꼈다. 회사에서 구조조정으로 내밀려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사연 외에는 그의 개인사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굳게 다문 그의 입 속에는 명예퇴직 외에 또 다른 깊은 슬픔이 숨겨진 듯했다.

그 슬픔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했던 나는 그의 속내를 알아보기 위해 종종 같이 밥을 먹으러 갔다. 내가 대접하는 것이라고는 국밥에 소주 한 병이 전부였지만, 그는 그마저도 무척 고마워했다. 하지만 그는 내 기대와 달리 술병이 바닥을 드러낼 때가 되어도 별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의 속내를 끄집어내지 않았던 그는 어느 날엔가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어슴푸레 새벽이 찾아드는 무렵, 근무 교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그 시각에 나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잠시 책을 보고 있었다. 그는 동이 터오는 먼 하늘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지나자 그의 눈물은 어느새 굵은 방울로 바뀌어갔다. 뜻밖의 모습에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난감했던 나는 일단 그를 집으로 데려갔다. 헛헛해진 속을 달래기 위해 라면을 끓여 요기한 다음 그가 스스로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

그의 첫마디는 나의 예상을 빗나간 것이었다. “정말 사랑했습니다. 저도 그랬고, 아내도 그랬습니다. 함께한 세월이 벌써 20년인걸요.”

아내의 가출, 그로 인한 충격과 고통의 시간. 그는 이 때문에 그렇게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반평생을 함께 해왔던 자신의 배우자가 어느 날엔가 아내와 어머니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일 것이다. 그동안 함께 발걸음을 맞춰가며 살아온 세월이 적지 않았기에 어지간한 시련이나 고통은 그들 사이를 흔들어 놓지 않을 텐데, 왜 갑자기 그의 아내가 사라져버렸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제가 일을 만든 거죠. 제가 회사에서 쫓겨나지만 않았더라도….”

실직을 한 남편 대신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의 부인은 보험회사를 다녔다. 그러나 동료 직원과 눈이 맞았던 그녀는 남편 앞으로 빚만 잔뜩 떠넘기고 그와 함께 어디론가 종적을 감췄다. 그가 밤을 새워가며 벌어들인 허깨비 같은 그 돈은 고스란히 빚쟁이들의 손으로 넘어간 것이다.

우리주변에는 적지 않은 이런 비슷한 사례들을 듣기도 하고 만난다. 가정이란 소중한 울타리를 지키는 일도 자신이겠지만 분에 넘친 이성의 혼탁함 끝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정한을 남겨두는 일들을 목도하면 인간이란 진실의 근원을 찾는 물음들이 나오게 된다.

“그게 어디 혼자만의 잘못이겠습니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함께 짊어지고 있는 업보 같은 것이지요. 용기를 내세요.”

나는 주제 넘는 말을 내뱉었다.

“나는 언제까지고 아내를 기다릴 셈입니다. 잠시 부는 바람이기에 언젠가 그치겠죠.”

혼잣말처럼 말을 내뱉는 그의 눈에는 진심 어린 외로움과 그리움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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