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처럼 어둡다. 혼돈이 여전하고, 짙은 안개는 방향을 분간 못하게 한다. 잘못 발을 내디디면 낭떠러지로 추락하리라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하지만 나아가지 못하면 새 세상을 열 수 없다.
15세기 유럽도 그랬다. 중세의 어두운 그늘에서 탈출해 르네상스라는 부흥기를 맞았지만 ‘깨치고 나아가는’ 추동력은 아직 얻지 못했다. 편협한 지식과 유럽의 틀에 갇힌 좁은 시야는 후진기어를 넣은 자동차처럼 반동(反動)의 위험으로 다가서 있었다.
이때 나침반이라는 물건이 ‘아이폰’처럼 시대혁명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이미 12세기쯤 전래돼 유럽을 하나로 묶은 나침반이었다. 하지만 유럽인들의 마음에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운 본성이 도사리고 있었다. 중세 미신적 종교가 남긴 우울한 유전이었다.
이러한 시대에 나침반은 어둠을 뚫고 새로움을 향하는 아이콘으로 진화했다. 나침반이라는 기술은 이미 있었지만 상상하자 미래를 가질 기회가 제공됐다. 별이 없는 밤에도 먼 뱃길의 안전을 보장한 나침반은 대항해시대로 유럽을 안내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자,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 것이다.
계사년(癸巳年)을 맞은 우리의 상황이 15세기 유럽과 별다를까. 대통령선거가 끝났지만 여진(餘震)이 남았다. 좌우로 나뉜 대립구도는 오히려 공고화되고, 사회적 모순은 여전하다. 젊은이들은 좌절하고, 장년층은 암울하다. 엄마들은 애 낳기가 무섭고, 옥죄는 빚은 가정을 파괴한다. 여기에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일·러 4강의 새로운 지도부가 출범했지만 긴장감은 더한다. 새로운 태양은 떠올랐건만 갈 바를 모르겠다.
우리에게도 나침반이 절실하다. 살아가는 게 힘든 영혼들을 싣고, 파괴적 암초를 피해 안전한 항구로 인도할 나침반 말이다.
국민대통합이 최우선이라고 한다. 경제도 살려야 하고, 복지도 늘린단다. 고맙고 반가운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침반같이 국민 누구나 신뢰할 방향성이 우선돼야 한다. 나침반의 종주국인 중국은 명나라 때 정화의 세계일주 후 새 시대를 주도할 방향성을 상실했다. 반면 유럽은 전래된 나침반을 발전시켜 수백 년간 선별된 삶을 영위했다. 손에 쥔 것보다 미래에 대한 상상력의 차이가 가져다준 엄청난 결과는 엄혹했다.
‘나침반 같은’ 정책, 지도자, 기업을 통해 밝은 미래가 상상되길 기대한다.
김진호 편집이사·인천편집경영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