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빛으로 가득한 화창한 봄날이다. 지난겨울 강추위를 이겨낸 나뭇가지가 초록으로 물들고 버드나무 끝에 매달린 버들강아지도 살이 올랐다. 봄내음이 물씬 풍기는 길을 걷다가 꽃물결이 넘실대는 화훼단지에 들렸다.
화원은 봄꽃을 사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활짝 핀 진달래꽃 사이로 꼬부라진 할미꽃이 눈에 들어왔다. 참 오랜만에 보는 토종봄꽃이다. 밥주발 같이 생긴 화분에 수북한 흙더미를 헤치고 고개를 내민 꼬부라진 할미꽃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자주색 꽃망울을 막 터트리고 있었다.
할미꽃은 가까운 야산이나 논둑길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농촌에서도 보기가 힘들다. 이른 봄 양지바른 곳에서 피는 할미꽃은 다른 봄꽃들보다 먼저 봄소식을 전하는 봄의 전령사다. 추운 겨울이 채 가기도 전부터 새 봄을 맞이하는 할미꽃은 고된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허리가 꼬부라졌다. 어려서부터 온몸엔 하얀 솜털을 뒤집어쓰고 잔뜩 휜 허리에 꽃망울은 언제나 땅바닥을 향하고 있다.
할미꽃은 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옛날에 세 딸을 정성껏 길러 시집을 보낸 할머니가 큰딸과 작은 딸을 찾아 갔으나 문전 박대를 했다. 할머니는 어느 겨울날 가난하게 살고 있는 셋째 딸의 집을 찾아 나섰다가 막내딸이 살고 있는 마을 앞 고갯마루에서 눈보라 속을 헤매다 허기와 추위에 지쳐 죽고 말았다. 이를 슬퍼한 셋째 딸은 할머니를 양지바른 언덕에 고이 묻어 드렸다. 그 이듬해 이른 봄 무덤가에는 할머니처럼 등이 꼬부라진 꽃이 피었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이 꽃을 할미꽃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할미꽃을 보면서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났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부모님의 산소에는 유난히 할미꽃이 많이 피었다. 철없던 어린 시절 부모님이 있어 행복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렇게 소중함은 나이를 먹으면서 깨달았다. 오늘따라 부모님이 보고 싶고 그리워진다. 살아생전에 효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함을 가슴 아파하며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고 또 빌었다.
맹자는 인생삼락(人生三樂)에서 부모가 모두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을 첫 번째 즐거움으로 여겼다. 주자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후회하는 열 가지 중 첫 번째가 불효부모사후회(不孝父母死後悔)라고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 후회하지 말고 살아 계실 때 효도를 하라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태어나서 결혼을 하면 부모가 된다. 그리고 누구나 늙게 마련이다.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가르침에 순종해야 한다. 늙으신 부모님을 부양하고 살펴드리며 공경해야 한다. 부모님을 업신여기면 먼 훗날 자신도 업신여김을 받는다.
오늘 할미꽃을 보면서 부모님께 불효를 하는 것이 부모님께 얼마나 큰 슬픔을 안겨 드리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 세상에 눈보라가 치는 고갯마루에서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막내딸과 같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물질만능주의가 도덕과 윤리의식을 뒤흔들고 각박해지고 있는 세상에서 할미꽃은 나에게 부모님에 대한 효를 뒤늦게 가르쳐 주고 있었다.
▲한국작가 수필부문 등단 ▲경기도 신인 문학상 수상 ▲문학시대 동인 ▲한국작가동인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성남 문인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