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잔잔한 날 밭둑에 들불을 놓는다. 라이터를 그어대자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덤불들, 바람의 방향을 따라 불길도 자리를 옮겨간다. 들깨며 콩 옥수수 등 수확은 별로 없고 가지만 무성했던 것들이 잘도 탄다. 콩은 너무 가까이 심어서 줄기만 무성했고, 옥수수는 가뭄에 타고 거름이 부족했는지 꽃 피는 것부터 시원찮았다. 해바라기는 제법 무성하게 자랐는데 태풍에 대부분 꺾이고 몇 송이만 건져 씨앗은 되겠다.
풀을 감당하지 못해 깔았던 검은 비닐이며 이런 저런 것들을 긁어모으고 마늘을 덮고 어린 감나무를 감쌌던 짚을 끌어 모아 태우니 밭이 한결 정돈된 것 같다. 들불을 놓는 것은 한해 농사의 시작이며 땅 밑을 깨우는 일이기도 하다. 풀섶 어딘가에 남아있을 애벌레를 혼쭐내는 일이고, 올 한해도 잘 해보자는 땅과의 약속이기도 하다. 삽날을 깊이 박아 땅을 뒤집자 놀란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면 흙이 살아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된다.
어설프게 농사를 짓다보니 모순투성이다. 초가을에 심어야할 당근을 봄에 심었더니 장마에 다 녹아 없어졌다. 작년에는 콩을 심기가 무섭게 까치와 비둘기가 파먹어서 애를 먹었다. 녀석들 어떻게 아는지 용케도 콩을 파갔다. 콩 농사 제대로 지으려면 콩에 약을 발라서 심으라는 이웃의 충고도 있었지만 어차피 하늘이 지어주는 농사이니 같이 먹고 살자고 그냥 심었더니 절반이상은 그놈들 차지가 된 모양이다.
밭이 길 옆에 있다 보니 어차피 농작물들이 온전한 내 차지는 아니다. 수확기에 접어들면 조금씩 손 타는 것이 있어 신경도 쓰이고 화도 났다. 하여 철망을 쳐야 하나 문을 달아야 하나 고민도 해보았지만 그냥 놔두기로 했다. 욕심내어봐야 다 먹지도 못하고 이웃과 나눠먹는 것이니 필요한 누군가가 가져갔나 보다. 그들이 먹고 나머지 우리가 먹자 하고 마음을 먹으니 편안해졌다.
들불을 놓고 나물을 뜯었다. 봄에 새순이 나면 뜯어먹으려고 심어놓은 돌산 갓과 쪽파를 다 캐가고 없다. 냉이며 봄나물을 캐다가 눈에 띄니 뜯어간 모양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야속한 생각도 들었지만 남겨놓은 냉이만 한 바구니 캤다.
이것저것 파종을 하고 드나들다 보면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야채를 보게 된다. 먹는 즐거움보다 그것들 자라는 것을 보는 기쁨이 더 크다. 밤새 이슬이 키우는지 푸성귀는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호박은 탁구공만 하던 놈이 며칠 지나 보면 야구공만 하고 곧 애호박이 되어 식탁에 오르니 얼마나 신기한가.
밭에 오가는 기름값 가지고 야채를 사먹는 것이 싸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조석으로 밭에 나가 풀을 뽑고 물을 대주고 풋고추 몇 개 따와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하루가 상쾌하다. 말벌에 쏘여 응급실을 달려가기도 하고, 가끔 스치는 뱀에 심장이 조여들 만큼 놀라기도 하지만 흙과 땀에 뒤범벅이 되어도 마음은 건강해진다.
타들어가는 불꽃을 본다. 올 한해 얼마나 많은 하늘이 이곳을 들렀다갈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에서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과 감사를 배울 것이고, 땅이 얼마나 정직하며 하늘이 위대한지에 대해 수시로 놀라면서 농경과 친해질 것이다. 매화나무가 꽃을 잔뜩 머금고 있다. 매화나무는 꽃을 피우기 위해 겨우내 고단한 준비를 했을 것이다. 물줄기를 끌어올리려 얼마나 숨이 가쁠까 하는 생각에 불길이 가까이 오는 것도 놓쳤다. 불길이 바람의 방향을 읽어 연기를 몰아가듯 나의 농경도 자연에 순응하고 그 안에서 행복할 것이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안견문학상 대상(시) ▲시집: 푸른 상처들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