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은 시대를 초월한 영웅이다. 잔인한 정복군주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으나 어찌됐든 칭기즈칸은 전쟁으로 전인미답의 새로운 세계를 건설했다.
1995년 말,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1천 년간 누가 최고의 인물이었을까”를 되묻고, 답한 적이 있다. 정답은 칭기즈칸이었다. 1997년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세계를 움직인 가장 역사적인 인물’의 가장 높은 자리도 칭기즈칸이 차지했다. 현대에 와서도 칭기즈칸의 영향력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서 높게 평가된다.
칭기즈칸의 일대기는 수많은 책과 영화, 그리고 노래 등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가 거둔 빛나는 승리를 분석하는 자료도 엄청나다. 각종 전사를 연구하는 전략가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전쟁방법에서 경영을 배우고, 삶의 지혜를 빌리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당시 그 누구도 꿈꾸지 못한 전술과 전략, 공성 무기, 용감한 병사, 신상필벌, 용인술, 포용력 등에서 해답을 얻으려는 연구가 산더미다.
하지만 칭기즈칸은 어느 통치자보다 속도에 민감했음을 간과하면 반쪽만 보는 것이다. 특히 전쟁터의 상황과 3개 대륙에 펼쳐진 제국을 통치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누구보다 빨리 알기를 원했다.
전사가(戰史家)들에 의하면 칭기즈칸이 유럽 원정에 나섰을 때 파발마는 잘 다져진 역참제도를 이용해 하루 동안 무려 352km를 이동했다. 30km마다 설치된 역참에서 말을 갈아타며, 유럽 전쟁터에서 북경에 이르는 길을 2주일에 돌파했으니 과히 빛의 속도다.
칭기즈칸보다 훨씬 후대지만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한 엘리자베스 1세의 왕실공문은 하루 96km를 전진하는 데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칭기즈칸시대보다 500년이 지난 임진왜란 당시 경상좌수사가 띄운 파발은 한양에 4일이 지나 도착했으니 전쟁대비에 늦은 것은 당연하다.
칭기즈칸의 역참제는 요즘의 인터넷과 유사하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역참의 길을 따라 속속 공급됐다. 그러니 칭기즈칸을 비롯한 몽골의 통치자들은 세계 누구보다 먼저 알고, 먼저 판단하는 게 가능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는데, 누가 몽골을 이길 수 있었겠는가.
‘성을 쌓는 자 실패하고, 길을 내는 자 성공한다’는 말은 만고의 진리인 듯하다.
김진호 편집이사·인천편집경영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