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이 우거지고 있는 이때, 믿기 힘든 소식이 들려왔다. 경기문화예술을 위해 일평생을 바친 호림 선생이 영면하셨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수원이 울고, 경기도가 울고, 온 산천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정규호 선생은 살아생전에 알게 모르게 나눔과 배려를 실천한 분이었다. 문인이라고 하기엔 경력이 미천했던 시절에 필자는 독자 입장에서 시를 투고했고 임병호 시인과 만나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면서 필자는 시인이 되어갔고, 수원상공회의소 지하 상아그릴이며, 인계동 나드리 뷔페는 문학인들의 처소였고 크고 작은 행사를 치러낸 것은 물론 가장 우아한 장소였다. 그때의 브라운관광호텔은 지금의 리젠시호텔이었고, 북문예식장에서 문학행사며 정기총회를 하곤 했다.
그런 가운데 정 선생을 만났다. 당시에 그는 예술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고 모두가 정규호 선생 앞에서 고개를 숙인 듯했다. 그리고 정규호 선생은 필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문학이 위대한 것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아픔과 슬픔을 문학을 통해 희망으로 승화해 내기 때문이다. 정 선생을 지켜보며 문학과 문학가가 왜 위대한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정 선생은 삶의 슬픔을 문학으로 치유했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다채로운 인생을 경험한 정 선생의 글들에는 삶의 아이러니, 기교를 일으키는 기지와 에스프리의 쾌재, 현대의 아픔을 토해내는 슬픔 등이 깃들어 있었다. 살다 보면 세파에 흔들리곤 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피어나는 꽃’은 없으니 희망을 품고 살아가자는 교훈을 던지셨던 것이다.
그런 선생의 성품을 잘 알고 있던 지인들은 이렇게 평한 바 있다. 상공회의소 명예회장 우봉제는 ‘그의 글을 읽으면 마음에 부담이 없는 데다 재미가 있고, 내 자신이 미처 체험하지 못했던 일들을 일깨워 준다’고 말했다. 중견 수필가 밝덩굴은 ‘정 선생은 소의호(笑矣乎, 웃음이 보따리로 나오는 버섯)를 몸에 지니고 다니시는 것 같다’고 말했으며, 중견 동화작가 윤수천은 ‘그의 수필은 한국적이면서도 서민적이어서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문인들 사이에서 좋은 작품을 쓰는 것으로 통하는 정규호 선생은 아쉽게도 여러 권의 책을 펴내지는 못했다. 수원예총회장과 경기도예총회장을 여러 해 동안 역임하면서 수원예술대상도 만들어 사재를 털어 문학인들의 사기를 충전시켰고, 호림장학금으로 90명에게 1억4천만원을 후원해 주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했기 때문이다. 또, 지방자치 시대가 열리고 첫 수원시의회 의원으로, 또 부의장으로 지역사회에 봉사한 바도 있다.
평소에 필자는 동태찌개를 먹으며 정 선생님과 술잔을 나누며 문화예술계의 발전을 논의하곤 했는데, 이런 행복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으니, 그 절망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호림 선생은 그토록 좋아하신 술과 담배를 마음껏 사주시고 필자는 그저 받기만 했는데,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어떡할까. 정 선생은 병석에 누워계실 때도 지역 예술인들의 안부를 일일이 챙기곤 하셨다. 좀 더 자주 선생의 병상을 지켜드리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의 짐으로 남을 것만 같다. 이슬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지는 게 인생인가 보지만 한세상 산천을 말달리던 당신의 용맹은 그 어디에 두고 가시려는지…. 아직 더 보아야 할 많은 강들, 계곡들, 벌판들, 나무들이 선생의 가슴과 문장으로 재탄생해야 하는데, 이 많은 것들을 놓고 이렇게 서둘러 가시다니….
호림 선생은 이 시대에 참으로 아름다운 분이셨다. 아니 이 땅의 산봉우리들 위에 한층 높이 솟은 산봉우리 같은 분이셨다. 경기예술이 혼돈을 맞던 시대에 사재를 털어 호림장학금을 만들고 몇 해 전에는 수원장학재단에 기부하셨다. 단지 물질을 기부한 게 아니라 호림 당신의 온몸을 기부하셨다.
선생의 장례식에는 김용서, 홍기헌, 이창식, 염태영 수원시장 등 경기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모여 지난 24일 아주대병원 영안실에서 수원예총장으로 치렀다. 필자는 조시를 낭독했다. 이 땅에 길이 새겨질 이정표였던 湖林 정규호 선생의 그 향기는 세월이 흐르면 비록 희미해질 테지만 영원히 그 향기를 기억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