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전협정 60주년을 맞이하여 중국군으로 참전했던 중국인 3명이 파주시 중국군 묘지를 참배했으며 당시 국군과 만나 화해했다는 보도다. 6·25전쟁 당시 중국군은 240만 명이 참전했으며, 40만 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군의 참전과 관련하여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휴전협정에 조인한 인물이, 중국인민의용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이다. 그는 마오쩌둥과 같은 중국 후난성 출신이다. 조실부모하여 조모와 어린 동생들과 함께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빈한한 유년기를 보냈다. 1928년 1월 공산당에 입당하여 고비마다 능력을 발휘하므로 유능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1934년 대장정에서 마오쩌둥과 때로는 동지로, 때로는 라이벌로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 애증을 나누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고 10월 1일 3·8선이 무너지자 김일성은 중국에 참전을 요청하였다. 마오는 공언한 대로 파병을 결정한다. 사령관으로 가장 유력한 후보는 속유였으나 병중이었기에 마오는 린바오(林彪)를 거론하였다. 린바오는 미국과의 전면전이 예상되기 때문에 파병 자체를 반대하였다. 그 결과 팽더화이가 사령관이 되었다.
1950년 10월 19일 중국군은 인해전술이란 말을 실감케 하듯 물밀 듯이 진격해왔다. 일시에 전세는 역전되었다. 1950년 11월 25일 미군 전투기가 평양공항을 폭격하였다. 중국 비행기에는 마오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이 타고 있었다. 그는 현장에서 비행기와 함께 산화하였다. 이는 후에 펑더화이를 궁지로 몰아넣는 구실이 되었다. 펑더화이는 전쟁 참전으로 영웅이 되었다. 1954년 마오는 어쩔 수 없이 그를 국방부장에 임명하였다. 실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1957년 마오의 공산주의 실험이 시작되었다. 이름하여 인민공사와 대약진운동이다. 실험은 완전 실패로 끝나 중국은 곳곳에서 대규모 기아가 발생하였다. 펑더화이의 고향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고향에 온 그는 아비규환의 현장을 목도했다. 그는 마오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썼다. 참상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1959년 7월 장시성(江西省) 북부의 루산(盧山)에서 중국 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가 열렸다. 마오는 펑더화이의 편지를 공개하면서 비판했다. 류사오치, 덩샤오핑, 주언 라이 등이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펑더화이는 마오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충고하였다. 이로 인해 둘 사이는 돌아오지 않은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1966년 8월 마오는 중국을 또 한 번의 춘추전국시대로 만드니, 곧 문화대혁명이다. 12월 그는 어린 홍위병에 의해 베이징 수용소에 수용되어 인간으로서 받을 모든 모욕을 당하였다. 규탄대회에 끌려가서 몽둥이로 얻어맞아 늑골이 여러 개 골절되었다. 260여 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았다. 마오안잉을 죽게 했다는 모함도 받았다. 소련과의 음모설도 추궁 받았다. 그는 굴하지 않았다. 1970년 9월에 작성한 진술서는 이러하다. “나는 떳떳하며 가슴을 펴고 ‘내 양심은 깨끗하다’고 백 번이라도 외칠 것이다.”
1974년 11월 29일 그는 직장암으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류사오치처럼 시신은 가명으로 처리되었고 사망 사실도 생전에 발표되지 않았다.
2008년 손호철 교수가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 행로를 답사하고 쓴 ‘레드로드’를 보면 손 교수는 펑더화이의 기념관 앞에서 이렇게 기원한다. “펑 대장군, 고이 눈을 감으소서.” 여기에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당신은 통일을 방해한 한국사의 이단아로 기억되고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