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를 상징하는 것 중 청진기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의사 하면 곧 청진기며 청진기 없는 의사는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만큼 의사와 청진기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다.
청진기는 주로 심장과 폐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 의료기구다. 청진기가 없었던 18세기에는 이런 소리를 들으려면 의사가 환자의 몸에 직접 귀를 대고 청진을 해야 했다. 청진은 그리스 시대에 히포크라테스가 환자의 몸에 자기의 귀를 대어 체내의 음을 직접 청취한 데서 비롯된 방법이다. 그러나 여성 환자의 경우 청진부위가 매우 민감한 부분으로, 벗은 가슴에 직접 귀를 대야 하는 의사들은 진료 때마다 난처함을 겪기 일쑤였다.
흉곽내과의 창시자로 알려진 프랑스 의사 르네 라에네크(1781~1826)는 1816년 어느 날 놀이터에서 어린아이들이 긴 막대기의 양끝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으며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무릎을 쳤다. 이에 영감을 받은 그는 병원으로 돌아와 바로 종이를 둥글게 말아서 환자의 가슴에 댔고 심장소리를 명확하게 들을 수 있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3년 후 1819년 길이가 9인치(22Cm), 직경이 1인치(2.5Cm)인 대롱 청진기를 개발해 흉부의학의 역사에 혁명을 일으켰다. 의사와 환자의 난처함을 없앤 것은 물론이다.
최근 의사의 청진기 사용을 둘러싸고 여성환자와 성추행 논란이 늘고 있다. 특히 지난해 8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아청법) 시행 이후 의사들은 과다한 법 규정이 진료를 위축시킨다며 크게 반발해 왔다. 아청법은 청진 시 여자 환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고 고발한 경우 의사는 성추행으로 인정돼 벌금 수십만원을 내고 10년간 취업·개설이 불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사태가 이렇게 번지자 최근 전국의사총연합(전의총)이 페이스북에 “여자 환자 분은 의사 지시에 따라 청진기를 직접 본인의 몸에 대시면 됩니다”라는 홍보문구와 함께 3m 길이의 청진기를 공동구매 한다고 나섰다. 성추행 고발도 사전에 막고 법규의 부당성도 알린다는 취지다. 하지만 왠지 씁쓸하다. 의사의 상징인 청진기까지 특수 제작해야 하는, 신뢰가 추락한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까지 하다.
/정준성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