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 새해가 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안녕하지 못한 것 같다. 수년째 지속되고 있는 송전탑 건설문제로 어려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밀양 주민들, 해군기지 건설 건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제주 강정리 주민들, 철도 민영화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철도노동자들 등 국내는 물론이고 자연재해로 고통 받고 있는 필리핀, 내전중인 남수단의 난민들까지 주위를 둘러보면 어려운 이들이 정말 많다. 자본주의 성장에 수반되는 구조적 한계는 자의적 자선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는 깨달음에서 사회복지는 국가의 필수 제도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에서 최초로 복지국가가 등장하였고, 이어 개별 국가의 역사적, 문화적, 사회경제적 수준에 부합하는 다양한 형태의 복지국가 유형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이상적인 국가로 여기는 스웨덴의 복지모형은 일상생활에서의 공평성과 높은 조세부담을 수용하는 국민들의 합의가 전제될 때 작동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공평성 보장이 미약하고 증세에 대해서 부정적인 우리 현실에서는 스웨덴 복지모형은 실현되기 어렵다.
서구를 비롯한 많은 국가들의 경우 사회복지가 제도화되기 전에는, 종교의 자선활동이 사회복지제도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지금도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국가에서 보편화되어 있는 사회복지기관과 사회복지전문가의 역할은 종교기관의 사회선교활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회복지활동은 종교적 전통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종교의 궁극적 지향이 개인수행과 동시에 이웃사랑의 실현인 만큼, 후자는 사회복지의 역할과 상당부분 일치한다. 이웃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상, 종교인들은 이를 외면하지 못한다. 그럼, 종교의 사회참여는 국가의 제도적 지원이 미약한 어려운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에만 한정된 것일까? 외국의 예를 보면 종교의 역할은 좁은 의미의 자선에 한정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2006년 영국 성공회 교구의 지역사회활동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지역주민들은 교회에 대해 ‘영적-사회적-경제적’ 차원의 개입을 바라고 있으며, 사제가 지역주민들의 다차원적 요구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즉 주민들은 교회가 그들의 영적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문제 해결에 동참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3월 취임 이후 보여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적극적 행보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가톨릭교회 사회참여의 새로운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작년 연말 철도 파업사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한 불교의 활동도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사회 약자들의 아픔 현장에 동참하는 종교인들의 모습은 종교의 본질적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중세 종교가 현실정치에 깊숙이 개입한 역사로부터 오늘날 종교를 기반으로 한 정당이 수권정당으로 활동하는 서구의 현실과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 종교는 주로 개인의 구원차원에 머무르고 있고, 사회참여는 상대적으로 미약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종교의 정치참여에 비판적인 정교분리의 핵심은 국가의 시민의 종교 자유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으로, 국가의 행동을 규제하는 규범이지, 종교인의 행동을 구속하는 규범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황의 말씀에서도 확인되는 바와 같이 사회참여는 일종의 종교인 의무로 되어 있다. 물론 종교의 역할이 세속의 법과 제도를 통한 개입과 동등할 수는 없다. 종교적 개입은 법과 제도가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것에 더하여 법과 제도가 해결하지 못하는 개인의 아픔을 치유하는 몫까지 감당해야 한다. 인간 삶의 모습이 정치적 측면과 복지적 측면이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나 개인의 안녕은 물론 사회정의와 평화의 보장을 위한 국가의 충분한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을 고려한다면, 종교의 적극적 사회참여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