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단식을 했습니다. 7일간 단식을 했으니 준비와 보식 기간을 더하면 두 주 정도를 한 것이지요. 대학원 시절, 후배와 함께 철원 한탄강 변에서 무작정 단식을 한 경험이 있어서 호기심이나 두려움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들어갔고, 또 잘 짜인 프로그램에 따라서 진행한 까닭인지, 배고픔도 잘 참을 수 있었습니다. 정작 힘든 것은 무료함이었습니다. 먹는 일을 중단한다는 것이 하루의 시간을 얼마나 연장하는 것인지 시간에 대한 관념이 정지된 것 같았습니다.
풍욕과 냉온욕을 번갈아 하면서 몸과 마음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선 몸이 가벼워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동안 몸과 음식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했는지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먹는지’가 자신의 몸을 규정한다는 것, ‘먹는 것’이 곧 자신의 존재라는 것을 머리로만 느껴오다가 비로서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몸을 비우고 깨끗하게 하니 마음도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아닌 것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 몸과 마음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독일의 여성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단식을 ‘살아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행복과 만족감을 얻는데, 단식은 오히려 자신을 온전히 비우는 데서 오는 다른 형태의 충만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발가벗고 풍욕을 하고 냉온탕을 번갈아 들어가면서 삶의 허허로움, 나 한 사람 지구를 떠난다고 해서 지구는커녕 주변 세상도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힘이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번거롭고 현란한 수사도 사라졌습니다.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지만, ‘침묵은 하나님의 모국어’, 하나님의 언어라는 누군가의 증언이 생각났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도 쓸데없는 간섭도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강변도 없어졌습니다. 누구도 읽지 않고 오직 나 자신이 독자인 하찮은 글들을 써서 세상을 어지럽힌 것도 부끄러웠습니다. 입만 열면 세상을 나무라면서도 정작 저 자신은 세차게 꾸짖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물론 이 모든 변화가 잠시뿐일 것입니다.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오고 시간이 가면 단식 후에도 꾸준히 몸과 마음을 지키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은 다시 번거로워지고, 입은 통제하기 어렵게 될 것이고, 욕망도 치솟아 오를 것입니다. 늘어나는 쓰레기처럼, 한 번도 입지 않고 쌓인 옷처럼 삶에도 때가 더 낄 것입니다.
새해 벽두에 무슨 단식 후기냐고 뜬금없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새해에는 무언가 달라지겠지,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겠지, 변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지만, 작심삼일이라고 마음을 따르지 못하는 몸 때문에 늘 실패한 경험 때문입니다. 모질게 마음을 다잡고, 몸을 더욱 세차게 구속하지 않으면 단식에의 기억이 몸에 살아있지 못하겠지요. 비움으로 충만해지는 삶, 구속할수록 더욱 자유로워지는 삶의 역설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겠지요.
남은 길은 단식의 반복인가 봅니다. 세계의 종교들이 단식, 금식을 정례화하는 것도 넓고 편한 길을 쉽게 선택하는 사람의 본성을 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몸은 훈련되어야 한다는 것, 훈련은 반복을 통하여 일상에 체현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단식이 꼭 종교적 이유나 병의 치유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바꾸기 원하는 사람, 삶을 그 끝(죽음)에서부터 보기를 원하는 사람, 그리하여 새로운 시작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해가 바뀐다고 시간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의 질적 변화는 우리 자신이 변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단식 후에 깨달았습니다. 영원한 삶은 시간의 무한한 연장이 아니라, 의미로 충만한 순간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의미로 충만한 순간은 인간의 몸으로, 특히 그 얼굴에서 표현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