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부지런하지 못한 나는 사소한 일도 뒤로 미루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서두를 때가 있다. 조금만 있다가 해야지 하다가 하루 물림이 열흘 물림이 되기도 한다. 어쩌다 손톱에 바른 매니큐어가 마음에 들어 하루만 더 있다가 지운다고 하다가 끝이 달아 지저분해지기도 하고, 머리 염색을 할 시기가 돌아오는 것을 알면서도 내일은 꼭 해야지 하고 또 며칠이 금방 지나 남들에게 게으름을 들키는 것 같아 찔끔하기도 한다.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는 가장 달콤한 속삭임이 바로 내일부터라는 말이 있다. 흔히 하는 말로 작심삼일이라고도 하지만 작심 수십 년이 되어 버린 일도 많다. 그 중에도 무언가를 배우고 싶기도 했고, 국토종단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던 적도 있다.
공인중개사 붐이 일면서 내 마음도 여지없이 바람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예상보다 만만치 않았고 주위의 얘기로는 결심이 섰으면 학원을 등록해서 제대로 하지 않을 바에는 꿈도 꾸지 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1차 합격을 하고 2차 준비하는 사람의 책을 달라고 해서 처음에는 꽤 열심히 들여다보는 척도 해보았다. 점점 힘이 빠지고 꽁무니를 빼기 위한 핑계를 열거했다. 우선 시간이 없고 하는 일이 힘들어 피곤하고 학원도 너무 멀고 컴퓨터를 주로 아들이 사용하기 때문에 등등. 그러면서도 시험에 대한 부담은 결코 나열하는 사유에 포함시키지 않는 앙큼함도 잊지 않았다.
아들이 자라면서 남편에게 함께 목욕탕에 가기를 요구했고,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독서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을 바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남편은 아들과 목욕탕에 가서 때는 닦지 않고 우유를 비롯한 음료로 배를 채우고 왔고, 독서보다 술 마시는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었다. 결국 모두 다음부터라는 말로 얼버무리며 내 화를 돋우었다. 아들이 수능을 앞둔 고3이 되어 제일 먼저 했던 말은 금주였을 정도였을까? 그러나 간곡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내일부터라는 말로 기약도 없이 미루어지다 수능 전날까지 이어졌다.
금덩어리보다 귀한 손자를 데리고 끼니 때마다 슈퍼에 가셔서 좋아하는 과자나 군것질 거리를 잔뜩 들려오시곤 하셨다. 그러면 오히려 밥맛을 잃는다고 몇 번을 말려도 달라지지 않아 급기야 주전부리를 전부 압수하고, 아이는 울며 떼를 쓰는 일이 생겨도 결국 다음이라는 말씀으로 미루기 일쑤였다. 장난감도 몰래 사주시고 비디오테이프도 할머니를 졸라 빌려보면서 들키면 번번이 다음부터라는 말씀으로 가로막으셨다. 하기야 그런 것쯤은 주체할 수 없는 사랑 탓으로 돌린다 해도 내일, 내일 하다 보건소에서 무료로 하는 노인 독감예방 접종 시한을 놓치시고 병원에서 맞으시고 아까워하시는 모습에는 웃음밖에 도리가 없다.
춘분을 지나고 나니 아침저녁 쌀쌀하긴 해도 여기저기서 봄을 발견한다. 계절은 저버리지 않고 약속을 지키고 나는 또다시 봄병이 도진다. 올해는 꼭 냉이를 한 움큼이라도 캐야지, 쑥도 뜯어서 쑥버무리도 해먹고 언젠가 맛본 수제비도 하고 쑥부침도 해야지, 하며 다짐을 하고 또 해보지만 결국 또 내일이 되고 말 것만 같다. 벌써 꽃다지는 노랗게 꽃을 흔드는데 무슨 말로 이 봄을 붙들 수가 있을까.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작가 신인상 수상 ▲가평문학상 수상 ▲가평문인협회 이사 ▲플로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