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규제를 가리켜 ‘쳐부술 원수이자 제거해야 할 암 덩어리’라고 했다. 이는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가로막는 규제의 폐해를 강조하기 위한 은유지만, 대통령의 발언으로서는 적절치 않다. 용어의 문제가 아니라 규제를 바라보는 대통령의 관점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규제’는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다. 개인의 자유권을 위임받아 구성원 전체의 공동체적 번영과 질서를 이끌고 관리하는 게 국가의 책무다. 국가의 통치행위는 헌법에 의거하지만, 구체적인 행정행위는 관련 행정법에 의한 규준과 절차를 따른다. 따라서 규제를 ‘쳐 부술 원수이자 암’이라고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최고 통치권자가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발언이 될 수 있다.
물론, ‘원수나 암덩어리’로 규정하는 것은 규제 중에서도 사회발전을 가로 막는 불필요한 규제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걸 굳이 ‘원수와 암’에 비유하면서 최고 통치권자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공중파 방송채널을 7시간 독점하면서 ‘규제개혁’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은 격에 맞지 않다. 규제에 문제가 많고 혁파를 해야 한다면, 피규제자인 국민을 대상으로 떠들게 아니라 규제자인 정부를 다그치는 게 행정부 수반으로서 대통령의 도리다. 따라서 정부가 만든 규제를 ‘원수와 암’에 비유하면서 국민을 대상으로 문제제기하는 것은 정부의 잘못을 누군가에게 떠넘기면서, 동시에 국민들에게 불필요한 불안감, 나아가 정부에 대한 불신만 키우게 한다.
규제는 늘 문제가 많고, 그 수가 증가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경제적·사회적 활동이 확장되면, 이를 규율하는 규제의 수가 느는 것은 당연하고, 또한 느는 만큼 중복되고 불필요한 규제가 덩달아 늘어난다. 따라서 규제개혁은 규제의 제정과 집행만큼이나 정부의 일상적 규제업무에 해당한다. 1997년 정부는 불필요한 행정규제를 폐지하고 비효율적인 행정규제의 신설을 억제함으로써 사회경제활동의 자율과 창의를 촉진하여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국가경쟁력을 지속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행정규제기본법’을 제정했다. 법 제정과 함께 같은 해 설치된 규제개혁위원회는 정부의 각종 규제에 대하여 폐지 또는 개선의 필요성을 심사하고 이를 관계부처별로 시행하는 업무를 주관하고 있다. 그러나 규제개혁위원회에 등록된 규제건수는 계속 증가해 왔고 현 정부 들어서도 그러하다. 문제는 규제의 양적 수가 아니라 규제의 사회적 합리성 여하다.
규제는 사회적 필요성에 의해 생겨난 것이고 규제법정주의 원칙에 따라 제도화된 것이다. 규제의 폐해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어느 일방의 주장으로만 존속과 폐지를 결정할 수 없다. 사회적 공익을 현저하게 침해하고, 규제의 사회적 합리성이 현격하게 결여할 때, 민주적 논의를 통해 해당 규제를 퇴출시켜야 한다. 따라서 철폐할 규제의 총량을 정해 놓고, 그에 맞추기 위해 부처별 목표량을 할당해서 기계적으로 줄이는 현 정부의 조치(예, 규제비용총량제)는 우둔한 짓이다. 규제를 외부로 대상화된 ‘원수’로 인식할 때만 이러한 짓이 가능하다. 규제의 총량을 10%, 20%를 줄여가는 과정에선 ‘좋은 규제’마저 덩달아 폐지되기 십상이다.
국민 개인에게 규제의 효과는 득과 해를 동시에 주지만, 사회전체로 보면 득이 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개인이 규제의 득을 볼 때는 규제의 필요성을 잘 모르지만, 피해를 볼 때는 ‘규제의 모든 게 잘못된 것’으로 인식한다. 대통령주재 ‘규제개혁회의’에 규제의 피해자를 불러다 발언을 듣고 규제개선을 직권으로 지시하는 ‘박근혜식 규제개혁’은 그래서 적잖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규제의 사회적 합리성을 따지지 않고 특정세력의 손익만 가지고 규제의 존폐를 결정하면, 그 세력에겐 득일지 모르지만, 그로 인한 폐해는 사회전체의 비용으로 남는다. 규제는 맹목적으로 없애는 대상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합리화해야 할 대상이고,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정부를 대상으로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