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케묵은 안부를 듣는다. 너무 오래되어 얼굴조차 상상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너무 뜻밖이라 어떻게 안부를 물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지만 반가운 목소리다.
남편 사업 실패하고 태백에서 잠깐 살았는데 그때 알았던 사람이다. 생전 처음 가본 땅, 사람도 낯설고 지형도 낯설고 모든 것이 불안하고 힘겨운 때였다. 지인이 방을 구해 놨다는 말에 무조건 이삿짐 싣고 갔는데 방문으로 장롱이 들어가지 않아 이삿짐을 싣고 다니며 방을 구해 겨우 살림을 풀었다.
두 칸 중 다시 방 하나에 세들었고 부엌은 두 집이 같이 사용해야 했다. 마당의 공동 수도를 써야 했고 물 사정이 어려워 조석으로만 수돗물이 나오니 물 전쟁이었다. 석탄가루가 묻은 흰 셔츠의 깃은 운동화 빠는 솔로 비벼야 때가 빠졌고 아이의 기저귀를 빨아 널면 석탄재가 묻어 거뭇거뭇했다.
이때 만난 이웃이다. 맘 붙일 곳이 없어 아이를 업고 온 동네를 쏘다녔고 그 친구도 우리 아이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업고 자주 나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화가 통했고 어울리게 되었다. 그 친구의 남편이 강원도 사람이라 태백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주었고 강원도 음식을 해서 나눠 먹곤 했다.
그녀는 토종음식을 잘 만들었다. 그때 먹었던 음식 중에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은 옥수수의 껍질을 벗겨서 팥물에 끓이면 팥과 옥수수가 어우러져 걸쭉하면서 달콤했다. 처음 먹어본 음식이라 신기했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친구가 생겼다는 것이 기뻤다. 첫 돌이 되기 전의 아이들이었지만 둘이 만나면 좋다고 함께 어울리는 모습이 좋았다.
이렇게 두어 달 살다가 다른 집을 구해 이사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우리가 평택으로 이사를 오면서 연락이 끊겼다. 그것이 삼십 년 전의 일이다.
서로 연락은 없었지만 가끔 떠올려지는 사람이었다. 같은 또래의 아이가 있고 나이가 비슷했기 때문에 서로 통하는 것도 많았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고향도 충청도로 같았고 성격도 거침없이 활달했다. 잔뜩 기죽어 있던 나에게 용기와 힘을 실어줬다.
태백에 가면 돈 벌 수 있다는 말에 갓난아이 들춰 업고 따라나섰지만 모든 것이 만만치가 않았다. 남편의 일은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고 그나마 얼마 남았던 돈마저 다 까먹고 정말이지 빈털터리가 되어 1년 만에 떠나왔다.
그 친구도 우리가 이사를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직장을 옮기면서 인천에 자리를 잡았고 지금도 인천에 산다고 한다. 잠깐 동안의 만남이었지만 늘 잊지 않고 살았다는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찾을 생각도 못했는데 먼저 찾아주니 미안하고 고맙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진다. 어떤 만남이든 아름답고 귀하지 않은 만남이 있으랴마는 잠깐의 인연이었지만 철없고 힘든 시기에 만나 어깨를 내주던 사람이다.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봄나물로 정성껏 상차림해서 그녀를 초대해야겠다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진다.
일을 하다, 길을 걷다가도 그녀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만나고 살진 못했어도 많이 그리워했나 보다. 힘겨웠던 태백이며 장성한 아이들의 이야기 등 가슴 후련해지는 한판의 수다를 늘어놓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