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 새벽2시쯤 (중략) 저녁에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에서 온 편지를 전하는데… 떼어보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움직이고 정신이 황난하다. 겉봉을 대강 뜯고 둘째아들 열의 글씨를 보니, 겉에 통곡(慟哭)이라는 두 글자가 써 있다. 간담이 떨려 목 놓아 통곡했다. 하늘이 이다지도 어질지 못한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만 같다. 천지가 어둡고 저 태양이 빛을 잃는구나! 슬프다 내 어린자식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상이 보통사람보다 뛰어 났는데 하늘이 너를 머물게 하지 않는가? 밤 지내기가 1년처럼 길구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10월14일자 난중일기 중 일부다. 자식을 잃은 비통함이 절절이 박혀있다.
육친의 죽음은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 즉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비참하고 견디기 힘든 게 자식을 잃는 일이다. 그래서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 단장지애(斷腸之哀)라 했다. 또 ‘부모 주검은 땅에 묻고 자식의 주검은 가슴에 묻는다’고 했듯이 자식 잃은 슬픔을 두고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근심 ‘참척(慘慽)’이라고도 한다.
자식 잃는 것보다 더한 삶의 고통은 없다. 소설가 박완서는 스물다섯 외아들을 앞세우고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20일 동안이나 하나님에게 따졌다. ‘왜’ ‘무엇 때문에’… 남편 잃은 지 석달 만에 당한 ‘참척’에 대해 스스로 미치지 않은 게 저주스러웠다며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저서를 통해 이렇게 썼다. “내 아들아. 이 세상에 네가 없다니 그게 정말이냐… 창창한 나이에 죽임을 당하는 건 가장 잔인한 최악의 벌이거늘 그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벌을 받는단 말인가. 이 어미에게 죽음보다 무서운 벌을 주는 데 이용하려고 그 아이를 그토록 준수하고 사랑 깊은 아이로 점지하셨더란 말인가. 하느님이란 그럴 수도 있는 분인가. 사랑 그 자체라는 하느님이 그것밖에 안 되는 분이라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아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상명(喪明·대를 이을 아들을 잃음)에 북받치는 설움과 분노가 얼마나 컸기에 이랬을까.
호곡(號哭)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안산 단원고 실종 학생들의 부모들. 오늘도 그들의 눈물이 바다와 하늘을 적시고 있다. 이 일을 어찌하나…
/정준성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