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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 따라 굽이굽이 쌓은 요새, 치욕의 역사 딛고 진화 거듭

경기도가 품은 평범한 진리, 세계문화유산
2.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 <끝>

 

종묘·사직 갖춘 유일한 행궁
유사시 임시수도 역할 수행
6월 세계문화유산 등재 판가름


병자호란 겪은 뒤 보장지 기능 강화
조총·화포 도입 성곽방어 적극 활용
봉암성·한봉성·신남성 등 외성 축성


연무관·현절사·지수당·서장대 등
조선시대 문화유적 많이 남아 있어




오는 6월 경기도의 또 하나의 옛 건축물인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다. 남한산성이 등재에 성공하면 국내 11번째 세계유산이 된다. 남한산성은 종묘(좌전)와 사직(우실)을 갖춘 유일한 행궁이다. 유사시 임시수도의 역할을 수행하던 곳으로 역사·학술적 가치가 크다.

남한산성은 ‘보장지’(保障地)였다. 보장지란 임시작전본부와 임시수도의 기능을 담당할 수 있는 안전한 요새지대를 의미한다.

남한산성은 1636년(인조 14년) 일어난 병자호란 당시 거의 10배에 달하는 청군의 공격을 군사적인 열세와 식량부족을 극복하며 47일간 항전을 벌인 곳이다.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은 숙종과 영·정조 시대를 거쳐 천혜의 요새로 진화하게 된다.



민족의 치욕, 병자호란으로 거듭난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서쪽의 청량산(淸凉山, 해발 497m)과 북쪽의 연주봉(連珠峯, 해발 466m), 동쪽의 망월봉(望月峯), 벌봉(해발 514m) 등을 연결해 쌓은 총 길이 11.76㎞(본성 9.05㎞, 외성 2.71㎞)의 대규모 산성이다.

백제 때 처음 성곽이 축조되고 조선시대에 와서 지리적 중요성이 인식돼 인조 때 산성을 새로 쌓았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을 겪은 뒤 방어체계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시도됐다.

호란 당시 조선은 홍이포와 같은 공성무기의 위력을 실감했다. 이는 과거의 조선의 주요 병기였던 궁시와 창·검을 대신해 조총과 화포를 성곽 방어에 적극 활용하는 계기가 됐다.

홍이포는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유래된 대포로 당시 네덜란드를 홍이(紅夷)라고 불렀기 때문에 홍이포라고 이름이 지어졌다.

 


화포의 도입은 병자호란 당시 홍이포를 응사해 천지총통을 발사한 전투 경험에서 비롯됐다. 화약병기의 발달에 따라 남한산성에는 봉암외성, 포루, 돈대, 옹성 등을 증축했고 문루와 장대를 축조했다.

병자호란 이후 전쟁으로 인해 무너진 성벽의 보수 및 원성에 대한 증개축도 이뤄졌다. 이때 남옹성 3개가 신축되고 연주봉옹성을 비롯해 4개의 옹성에 포루가 설치됐다.

그 뒤로도 많은 보수·수리 작업이 이뤄져 영조대에는 세 번의 큰 보수 공사가 진행됐고, 정조 3년(1779)에는 기와로 쌓았던 여장(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벽돌로 교체했다.

남한산성에 대한 보수와 별도로 외성에 대한 축성도 본격화 됐다.

원성 외에 성 바깥쪽에 덧붙여 쌓은 외성들은 모두 병자호란 이후 축성됐다. 남한산성의 외성은 ▲숙종 12년(1686)에 쌓은 봉암성 ▲숙종 19년(1693)에 쌓은 한봉성 ▲숙종 45년(1791)에 쌓은 신남성의 곳으로 구분된다.

병자호란 이후 새로 쌓은 신남성은 제7암문에서 남쪽으로 검단산 정상부에 있다. 신남성은 남격대 또는 대봉이라고도 불린다.

영조대에 보수된 신남성은 정조대 남한산성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과정에서 마지막 보완을 마무리했다.



신남성 축성으로 보장지 기능 강화

현재 남한산성의 외성이 축성된 봉암, 한봉, 검단산은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 점령당한 곳이다. 당시 화포공격으로 이곳은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성안의 사정이 적에게 훤히 드러나면서 회맹을 위한 협상과정에서 상당히 불리한 요소로 작용했다.

호란 이후 조선은 산성 방어의 요점으로 지금의 신남성이 자리 잡은 이현봉을 확보함으로써 적에게 노출된 고지를 방어하고 삼남지방(현 충청도·전라도·경상도)과의 통신 및 지원 물자의 보급로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외성 가운데 신남성이 적에게 노출된 고지에 대한 장악과 삼남지방과 연결되는 혈로(血路)를 확보한다는 목적으로 볼 때 임시작전본부와 임시수도의 기능을 담당할 수 있는 남한산성의 보장지 기능을 강화한 것이다.

신남성이 위치한 남벽의 방어력 강화가 엿보이는 부분은 주변 시설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남한산성에는 5개의 옹성을 두고 이 가운데 연주봉옹성과 장경사신지옹성을 제외한 3개의 옹성은 남벽에 집중하고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이중으로 쌓은 성벽을 말한다.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은 화포, 즉 화약병기를 활용한 방어체계와 외성 축성 등으로 한 단계 진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남한산성이 품은 역사 유적

남한산성 내에는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산성의 성벽과 문루를 비롯해 연무관, 현절사, 온왕묘, 침과정, 지수당 등 조선시대 건물이 남아 있고 최근에는 행궁이 복원됐다.

행궁 다음으로 비중이 높은 시설은 연무관이다. 연무관은 정조 때까지는 각종 사료에 연병관으로 기록되다가 철종 행행시부터 연무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성조의식을 거행한 서장대는 군사훈련의 가장 핵심이 되는 것으로 서장대에서 신호포가 울리면 산성의 각 시설에서 응포가 울리고 사방에서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는 화려한 군사 퍼레이드가 개시됐다.

인화관은 철종과 고종 때 과거 시험을 치룬 장소로 의미가 깊다. 문과시험만 치렀기 때문에 과거 장소를 연무관이 아닌 인화관으로 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밖에 시설 중 지수당(선비들 낚시터)은 정조가 각별하게 여겼던 장소다. 정조는 이곳을 방문해 이름의 의미와 건축한 사람의 이름을 묻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과 일성록에 기록돼 있을 정도다.

남한산성 지수당은 조선 현종 13년 건립한 정자로 당시 정자를 중심으로 3개의 연못이 있었으나 현재는 2개만 남아 있다.

/홍성민기자 h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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