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센의 ‘인형의 집’이 초연(初演)된 이래 120여년이 흐른 지금, 페미니즘은 세계 문화계를 관류하는 지배담론으로 자리잡았다. 그런 시대적 흐름과 상관없이 여성의 성적 자아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생략한 채 그저 절제하는 것만이 여성의 유일한 미덕이라는 자칫 고리타분하게(?) 보일 수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연극이 바로 ‘매디슨 카운티의 추억’이다.
그런데도 이 연극에는 관객들을 사로잡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 매력을 파해치기 전에 먼저 연극 ‘매디슨 카운티의 추억’의 무대위로 올라가 보자.
미국 남부 아이오와주 매디슨 카운티. 지붕이 있는 독특한 구조를 가진 로즈먼 다리를 찍기 위해 이곳을 찾은 자유기고가 킨 케이드와 작은 소망 하나 가슴에 품은 채 시골 농부의 아내로 평생을 살아온 프란체스카. 그 두 사람은 3일 동안 짧고 달콤한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프란체스카는 무책임하게 ‘생활’을 버리고 사랑을 따라가지 않는다.
같은 불륜을 다루면서도, 참혹한 결말을 맺는 영화 ‘언페이스풀(unfaithful)’의 첫 장면이 거세게 휘몰아치는 광풍으로 시작한 반면, 이 작품은 싱거운(?) 결말을 암시하 듯 흰 나방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정도의 산들바람을 만남의 모티브로 설정하고 있다.
극단 산울림의 임영웅은 이 연극을 연출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유명한 작품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보고 감동받았기 때문”이라고 일갈한다.
극중 프란체스카 역으로 열연한 배우 손숙씨의 말은 다소 의외다. “저는 이 역을 연기하면서 참 조심스러웠어요. 혹시 관객들에게 엉뚱한 충동을 일으키면 어쩌나 해서…”(관객과의 대화에서)
연출가의 간단명료한 대답이 기자의 질문을 압도한 반면 배우 손숙의 고민은 기자를 간단치 않은 고민에 휩싸이게 한다. 反페미니즘적 소재라는 기자의 우려와는 달리 정작 배우는 전혀 다른 방향의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현실 세계의 여성들은 여성의 성해방과 성적 자유를 거세게 주장하고 있다. 한편 성매매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문란할대로 문란해진 현실의 성문화는 온갖 성담론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을 엉뚱한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고작 3일간의 외도, 그것도 이렇다할 여지도 없이 그저 “역시, 가정을 버려서는 안돼!”라고 외치던 배우가 생뚱맞은 고민을 했다니…
서두에서 말했던 대로, 이 연극은 현실과의 불화를 스스로 자초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과의 불화야말로 대중의 관심을 이끄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20세기 초 화제를 뿌렸던 D.H. 로렌스의 작품들과 그에 대한 대중의 반응, 그리고 현대의 비평가들이 벌이고 있는 ‘로렌스 논쟁’을 들여다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로렌스의 작품 대부분은 여성에 대해 성차별적 묘사를 담고 있다. 그러나 당시는 물론 현대의 여성들도 그를 反페미니즘 작가로 매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로렌스는 여성들로부터 성차별적이라는 비난을 받는 한편 역설적이게도 여성의 삶을 그 누구보다 깊이 헤아리고 있는 작가라는 찬사를 동시에 듣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 ‘매디슨 카운티의 추억’은 크게 두 가지의 메시지를 동시에 담고 있는 연극이다. 권태로운 일상을 헤집고 문득 찾아온 사랑, 그 환희. 그러나 그 사랑을 포기하게 만드는 현실, 그 슬픔.
환희와 슬픔의 간극을 채워나가는 프란체스카(손숙 분)의 소리 낮은 절규가 만들어내는 벅찬 감동.
기자를 오랜만에 소극장의 객석으로 유인한 작품이다. 경기문화재단이 소극장활성화 사업을 본격 시작하기에 앞서 관객과의 호흡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업의 목적이라는 점을 대내외에 강조하기 위해 멀리(?) 서울에서 초빙해온 극단 산울림의 작품이다. 모쪼록 서울까지 갈 것 없이 이제 지역에서도 좋은 연극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